Home » 월별모음 » 2012.03월호, COLLECTION » [collection]Samuel Pollard(伯格理)와 석문감

[collection]Samuel Pollard(伯格理)와 석문감

-중국 소수민족선교 사례 –
1985년 당시 귀주성(貴州省) 서기(省委書記 및 軍區黨委第一書記)로 임명된 후진타오(胡錦濤) 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總書記)는 귀주성에 부임한 이튿날 각급 기관의 간부회의에서 영국 선교사 Samuel Pollard(중국명 伯格理)를 언급하였다고 한다. 선교사 Samuel Pollard가 귀주성 내 가장 외지고 미개한 위녕현(威寧縣) 석문감(石門坎) 일대를 “묘족문화의 부흥성지”(苗族文化復興聖地), “서남묘족의 최고 문화지구”(西南苗族最高文化?)로 변화시킨 이야기를 나누며 간부들을 독려하고 석문감을 방문하고자 하였지만 길이 험하여 위녕까지만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진타오 총서기는 자신의 후임자에게도 석문감을 꼭 방문하라고 전하였다고 한다.
중국중앙TV(中央電視臺)에서는 “증언·발견의 여행”(見證·發現之旅)프로그램 제작진이 제작한 “저 하늘 너머”(在天那邊)라는 프로를 2011년 2월2일 23:30부터 3회에 걸쳐 방송하였다. 내용은 석문감을 중심으로 한 영국감리교 선교사 Samuel Pollard의 사역과 석문감 일대에 미친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석문감” 혹은 “석문감의 伯格理(Samuel Pollard)”하면 중국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첫 사례들을 손꼽는다.
묘족 문자를 만들어 묘족의 문자부재였던 역사를 종식시킴,
우멍(烏蒙)산지에 첫 묘족 소학교를 개교하였으며 첫 신식교육을 도입함,
위녕현에 첫 중학교를 세웠으며 이는 서남 묘족 주거지역의 첫 중학교가 됨,
중국에서 처음으로 이중(묘·영) 언어교육을 실시하고 남녀공학을 처음 도입함
귀주성 역사 상 첫 학교운동장(축구장), 수영장을 지음,
묘족 역사 상 첫 번째 박사(모두 2명)와 여러 지식인들을 육성함,
20세기 전기 중국 서남지역에서 가장 큰 교육망을 형성하여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내 1백여 개 학교와 기관을 관할함,
우멍(烏蒙)산지에 첫 서양 의원을 세우고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함,
중국에서 처음으로 불소증(불소침착증)을 발견하고 보고함,
중국 최초의 한센병원을 개원함.
나아가 석문감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기독교 신자가 85%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소수민족 교회를 가능케 함.

20세기 50년대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3개 성(省)의 기독교인은 약 30만 명으로 전중국기독교인의 30%정도를 차지하였다. 오늘 날도 석문감 일대의 많은 묘족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어오고 있고, 귀주성과 운남성 일대에선 기독교가 “묘교”(묘족의 종교, 苗?)라 불리고 있다. 이는 지금도 “묘족의 구원자”(苗族救星) “묘족의 아버지”(苗族之父)라고 불리는 청말·민국 초기 중국에 파송된 Samuel Pollard 선교사와 뒤이은 선교사들의 서남민족지역에서의 성공적인 사역과 직접관계가 있다. 이 글에서는 Samuel Pollard 선교사가 중국선교, 즉 중국의 서남지역(운남성 소통(昭通) 일대)에서의 초기사역과 후기 석문감에서의 묘족사역을 어떻게 하였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Samuel Pollard 선교사는 1864년 영국의 Cornwall Camelford에서 가난한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다. 웨슬리언 초등학교 등에서 공부한 그는 넉넉지 못한 가계로 1876년 사역자 자녀 교육을 위해 개교한 the Bible Christian Proprietary Grammar School에 입학하였고, 1879년 Frank J. Dymond(중국명 邰慕廉), W. M. Hocking과 함께 옥스퍼드 지역시험(the Oxford Local Examinations)에서 최우수성적(First Class Honours)을 얻었다. 집안 평편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1881년 17세에 영국국가공무원시험(examination for men clerkships)에 7등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그는 런던에 있는 우편저축은행(the Post Office Savings Bank)에서 근무하며 한 때 여유로운 생활을 꿈꿨다. 1885년, J. Hudson Taylor(허드슨 테일러, China Inland Mission(중국내지선교회) 창시자)와 B. Broomhall(중국내지선교회 총무)이 런던회의에 초대되어 Hoxton의 Jubilee Chapel에서 중국선교를 고취하자 Samuel Thomas Thorne(중국명 托馬斯·索恩)과 Thomas Grills Vanstone(중국명 萬斯通)이 중국의 운남성 선교사로 지원하였고, Pollard는 다음 차례의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부모의 동의를 구한다. 1886년 그는 은행직을 사임하고 친구인 Frank J. Dymond와 함께 교회에서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1887년 1월 23세에 the United Methodist Church(基督?英國循道公會聯合傳?團)의 선교사로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이 동승한 배를 타고 중국을 향해 떠났다. 1887년 3월 상해(上海)에 도착한 그는 안경(安慶)으로 인도받고 중국내지선교회에서 세운 Training Home에서 F. W. Bailer(W·?勒 선교사)로부터 반년동안 중국어교육 등의 훈련을 받는다. 이듬해, 그는 Samuel Thomas Thorne이 사역하고 있는 운남성 소통(昭通)으로 중화기독교 순도공회 서남교구(中華基督?循道公會西南?區) 선교사로 파송된다. 길을 떠난 그는 양자강의 “탱천탄”(?天灘)이라는 곳에서 배가 파선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중경(重慶)에 도착하고, 중경에서 다시 22일간 거친 길을 걸은 후 10월 소통에 도착한다.
운남성 소통은 중국의 서남 오지에 있는 작은 성이었는데 슬픔과 불행이 가득하였다. 많은 주민이 가난을 겪고, 아편을 삼키며 자살하는 사건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자살을 시도한 자에 대한 구호요청과 안질에 걸린 아이들과 위장병과 학질 등에 신음하는 자들에 대한 치료의 요청이 이어졌고, Samuel Pollard 선교사는 소독약으로 아이들의 눈의 염증을 닦아주고 아픈 자들을 돌보고 치료에 힘썼다. 그의 “의술”과 “열심”은 그를 소통성의 명의로 인식되게 하였다. 변발을 하고 중국인의 (당시 만주족)옷을 입은 그는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중국어(한어, 漢語)로 복음을 전하며 선교에 힘썼다. 그러나 복음에 귀 기울이는 자는 드물었고, 복음의 열매도 별로 없었다. 1890년 11월 1일자 그의 일기에는 “… 이곳의 사역이 이렇게 어렵다니. 우리가 접한 가장 흔한 것은 (우리들에 대한) 저주와 의심이다.” 12월 31일자에는 “내가 알기로 금년에는 한 영혼도 구원 받지를 못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1890년) 7월 소통에서 최초로 사역을 시작한 Thomas Grills Vanstone 선교사 부부는 병환이 위중하여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얼마 뒤 Samuel Thomas Thorne 선교사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운남에서의 3년 동안 Pollard 선교사에게 친구인 Dymond과 함께 Vanstone과 Thorne은 유일한 동역자였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과 본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렵자 영국의 교회는 운남의 사역을 포기할 것을 권하였다. 심지어 Dymond 마저 중국인에게 폭행을 당하며 Pollard 선교사에게 함께 선교사역을 포기할 것을 제의한다. Pollard 선교사에게 가장 혹독한 시험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1890년) 12월 31일자 일기에 “한 해가 저무는 이때 … 당신의 도움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온 마음과 정성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나의 모든 몸과 마음은 다 당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거듭 다짐하는 그는 절망하지 않고 Dymond 선교사를 위로하며 사역을 지속하였다.
교착상태에 있는 선교사역과 주위 선교사들의 잇딴 이별 등으로 슬픔과 절망을 겪던 1890년, Pollard 선교사는 친교와 말라리아의 치료를 위해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선교의 집(곤명(昆明)에 세워진 병원)을 찾고 Emmie Hainge(중국명 海孝貞)) 간호사와 교제를 이어갔다. 1891년, Pollard 선교사는 6백 마일 너머 중경에 있는 영국영사관에서 Hainge 선교사와 결혼신고를 하고 부부 선교사의 사역을 시작한다. 운남 소통의 집현가(集賢街)에 자리잡은 신혼집은 운남 동북지역의 간판없는 첫 번째 서양 약국과 진료소가 되었다.
“벌써 몇 년 째인데 아직 회심자가 없다”는 1892년 8월1일자 일기에서 처럼 선교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다음해 9월3일에야 처음으로 두 사람(노부인)이 세례를 받고 12월21일에는 작은 예배당이 준공 및 사용되었다. 이때까지 중국에서의 선교사역은 이곳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미미하였다. 1893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1,511명의 선교사가 있었고 신자는 3,127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녹록지 않은 선교환경이지만 Pollard 선교사 부부는 연이은 재해로 굶주린 중국인들을 돕고, 남·여 식자반을 운영(1893년)하며 참석자들에게 글자(한어)를 가르치고, 교인들과 함께 전도에 힘썼다. 
1895년 Pollard 선교사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 쉼을 가지면서 모금을 하고 1896년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소통으로 돌아와 제 2기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치료를 위해 교회를 찾아온 상생(庠生, 생원) 이국균(李國鈞, 교명 李?翰)과 이국진(李國鎭, 교명 李司提反) 형제가 소통의 지식인으로서는 첫 신자가 되었고, 식자반을 교회초등학교 “중서학당”(中西學堂, 소통 최초의 교회학교)로 확대하여 쓰기, 산수, 음악, 체육, 지리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여학생을 교육시키고자 “우미회여학당”(優美會女學堂)을 운영하였다. 이밖에도 천족회”(天足會)를 발족하여 운남, 귀주, 사천 3개 성에서 전족폐지에 힘썼다. l900년의 의화단사건 이전 소통에는 약 30 명의 남녀 신자가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는 종환연(鐘煥然), 언우패(?雨沛, 교명 ??力), 이국균, 이국진 등의 한족 전도자들이 있었다. 의화단사건 발발 후 Pollard 선교사 부부는 홍콩으로 잠시 몸을 피한 뒤 1901년3월 다시 소통으로 돌아와 교인들과 함께 사역에 힘썼다.

운남의 소통 등지에서의 선교는 불교와 도교 및 전통문화의 저항, 중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경계 등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Pollard 선교사는 한족들의 (만주족)의(衣)·발(髮)을 하고 소통의 길거리를 누비며 하루 종일 전도하고 중국인들을 도왔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로부터 사람은 믿을 만하지만 그 종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에 사역의 진척이 쉽지 않았다.

1903年 겨울, Pollard 선교사는 1891년부터 이족(?族)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량산(凉山)의 이족 거주지역을 방문하였다. Pollard 선교사는 그가 중국에 온 목적은 “한 민족을 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늘 말하였고, 그 최초의 민족은 이족이 될 뻔하였다. 이족은 이른바 “타원가”(打?家), 즉 무력으로 원한을 갚았다. 량산의 이족들은 Pollard 선교사에게 부족들간의 분쟁을 해소시킬 것을 요청하며 4개 부족의 우두머리가 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묘족(苗族)의 방문 및 사역의 전개로 Pollard 선교사의 량산 이족을 향한 선교의 계획이 중단되고 선교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묘족 선교에 바친다.

1904년 7월12일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석문”(石門)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조서(張朝書, 장모세)를 포함한 4명의 한족(만주족) 복장을 한 위녕현(威寧縣)과 수성현(水城縣) 일대의 4개 “대화묘”(大花苗, 묘족의 일원)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소통에 있는 Pollard 선교사를 찾아왔다. 장모세는 2백여 마일 떨어진(9일 여정의 거리) 귀주성 안순성(安?城)에 있는 선교사(1887년 안경에서 한동안 함께 지낸 중국내지선교회 J. R. Adam 선교사)를 찾아가 예수에 관해 더 알기를 원했는데 Adam 선교사가 가까운 거리(이틀 길 정도)에 있는 Pollard 선교사를 찾아가도록 소개해주어서 소통에 있는 그를 찾아온 것이다. “대화묘”의 첫 번째 희망은 배움이었고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Pollard 선교사는 그들로 하여금 머물게 하고, 새로운 세계를 진심으로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소망하였다.
7월22일에는 또 다른 5인의 묘족인이 찾아왔고, 7월23일에도 13인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1905년 1월22일에는 170명이 몰려왔다. Pollard 선교사에 의하면 이때까지 약 4,000명의 묘족인이 방문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묘족들은 잦은 이주 및 넓게 분산되어 작은 단위로 거주하는 삶의 형태로 주변 다른 민족에 비해 강력한 응집력을 갖지 못하였다. 묘족인들 절대다수가 한 치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채 이족토사(?族土司)와 한족지주(漢族地主)들의 농노(農奴)와 전호(佃戶)가 되어 압박과 착취를 받고, 이 지역의 대화묘들은 명(明)·청(?)시대에서 중화민국시기까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높고 한랭한 산지에서 열악하게 살고 있었다. 이러한 묘족과 그 중 대화묘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라는 교회의 메시지는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모여드는 묘족들로 인해 소통 일대의 한족과 이족은 불안을 느끼고, 특히 토사(土司, 세습 족장)와 지주는 지배구조와 생산에 변화가 있을 염려에 분노하며 묘족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풍미하고 묘족을 학대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Pollard 선교사는 기독교 신앙으로 묘족이 박해받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회를 묘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세울 결단을 내린다. 1905년 3월7일 Pollard 선교사는 기도하면서 한족 및 묘족 신자들과 묘족을 위한 예배당을 세울 토지를 찾아 나섰다. 1905년 3월13일 선교사와 일행은 대관채(大官寨, 현 위녕현 小海區 松山)로 이족 토목(土目, 토사에 소속된 부하) 안영지(安榮之, 즉 安寬)를 방문하여 그로부터 토지를 증여하겠다는 응답을 듣게 된다. 3월29일 안영지는 Pollard 선교사에게 석문감에 있는 땅 10 에이커(60畝, 약 40,468제곱미터)에 예배당을 짓도록 계약서를 건넨다. Pollard 선교사 일행은 30마일을 걸어 석문감에 도착한 다음, 5월14일에는 초가로 지붕을 임시 덮은 예배당에서 묘족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계획에 없던 묘족사역과 예산에 없는 묘족 예배당 겸 학교 건축은 또 하나의 난제였으나 묘족인들 스스로 각 가정마다 100개 동전을 모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동전 1백만 개가 모임, 1백 파운드에 해당)
묘족들이 모여사는 석문감은 사천, 운남, 귀주 3개 성의 인접지역이고 귀주성 서북쪽 높고 한랭한 산지의 외진 산채이다. 위녕현 현성에서 142키로미터 떨어져 있고, 해발 2,600미터로 사면이 산이고 천길 가파르고 험한 지형이며 종일 짙은 안개가 쌓이고 겨울에는 눈이 두껍게 쌓이는 곳이다.

석문감에서의 Pollard 선교사의 교회개척 사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Pollard 선교사는 1904년 8월7일 소통에서 묘족인의 통역을 통해 첫 번째 묘족예배를 드린 뒤 1905년 3월 석문감에 첫 번째 교회를 세울 토지를 확정하고, 5월에 첫 예배를 드린다. 어떤 묘족인은 예배에 참여하러 이틀을 걸어서 오고, 예배당 헌당예배에 1천여 명이 참석하고,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은 얼마 안 되어 1,000-1,500명이 몰려옴으로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석문감에 교회가 세워지자 Pollard 선교사는 “이묘전묘”(以苗傳苗)한다는 전략으로 묘족 전도자 훈련에 주력한다. 주베드로(朱彼得)를 포함한 16명이 제 1기 훈련을 받고 이미 Pollard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고 있던 양야곱(楊雅各) 및 한족 전도자 등과 함께 2-3인 한 조로 사방으로 흩어져 전도에 힘썼다. 물론 Pollard 선교사도 1905년 6월21일자 일기에 언급한 것과 같이 질적으로 갖추어진 선교사의 추가 파견을 영국 교회에 요청하고, 본인도 당시 이미 2백 곳의 묘족산채를 정기적으로 방문할 정도로 분주히 섬기도 있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선교사와 한(漢)·묘(苗) 전도자의 노력으로 운남성 동북쪽과 귀주성 서북쪽에 있는 이량(?良), 소통(昭通), 대관(大關), 영선(永善), 염진(鹽津), 교가(巧家), 회택(會澤), 심전(尋甸), 위녕(威寧) 등 현(縣)에 묘족교회가 확장되었다. 
이와 함께 Pollard 선교사는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지역 언어를 원활하게 구사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평소에 갖고 이를 위해 항상 노력하였다. 과거 한어를 열심히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묘족에 대한 사역의 길을 열자 그는 묘족언어를 새롭게 배우고 묘족언어(苗語, 묘어)를 잘 구사하도록 최선의 다하였다. 그는 양야곱 등의 묘족인을 선생님으로 삼고 묘족언어를 습득하는데 힘썼다. 사실 그는 석문감에 오기 전 소통에서 묘족인들을 접하며 이미 묘어에 관심을 갖고 배우려고 애썼다. 1904년 8월7일자 그의 일기에는 “주일 밤 한족인들의 예배 후 묘족 중 2인의 통역을 통해 묘족예배를 드렸다. 그들을 보면 참 재미있다. 나는 몇 마디 말을 한 다음 통역에게 묘어로 내 말을 다시 한 번 해보라고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몇 마디 묘어를 배웠는데 그들과 같이 말 할 수 있었다.” 10월12일자에는 “현재 매일 묘족인들이 오고 있다. 그들의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도록 나는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들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모르면 정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 근래 나는 가르치면서 배우고 있다. 한 단어를 배우면 즉시 기록한다.” 그는 이런 적극적인 노력 끝에 10월13일자 일기에는 “오늘 밤 나는 묘어로 묘족에게 말씀을 전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짧은 기간 안에 그는 묘어를 습득하고 말 할 수 있었다. 이는 묘족사역을 위한 선교사의 지당한 자세이며 바람직한 본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역사와 위와 같은 Pollard 선교사의 헌신 및 여러 한·묘 전도자 등의 협력으로 1909년 12월까지 적어도 1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었으며, 1915년, Pollard 선교사는 “기독교 성도공회 서남교구 석·천연합지구”(基督?聖道公會西南?區石川聯區)를 책임지게 되었다. 귀주성의 위녕, 운남성의 소통과 회택 등지, 사천성의 균련(筠連) 등의 현에 분포되어 있는 약 70개의 지교회, 1만 명의 세례교인과 5천 명의 세례 전 학습자가 포함된 약 6만 명의 묘족과 이족 외의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1915년 9월 Pollard 선교사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석문감 일대의 대다수 묘족은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었다. 이에 석문감은 해외 기독교인들로부터 “해외 천국”(海外天國)이란 애칭을 누리고 있었다.

이밖의 석문감 일대의 주요 사역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학교 운영: Pollard 선교사는 교육전도사역을 중시하였다. 묘족인들 사이에서는 그의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Pollard 선교사가 사역하는 곳에는 교회와 학교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특히 묘족인들을 접하면서 그는 교육사역의 필요성을 더욱 인식하였다. 1892년 4월 소통에서 만난 묘족인을 통해 문자가 없는 것을 인지하였고, 1904년 소통으로 찾아온 묘족인들을 맞이하면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찬송가나 성경을 살 때 돈계산을 못하는 것을 보았다. 나아가 묘족인의 신앙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교육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였다. 이에 Pollard 선교사는 1905년 석문감에 교회학교를 세우고 1906년부터 묘족의 자녀들을 모집하였다. 모집시 남학생만이 아니라 여학생도 모집하고,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시켰다. 1906년 가을 개교시에는 26 명의 성년 교인들로 채워졌다. 나이가 가장 많은 학생은 46세였고, 32세의 양야곱도 있었다. 양야곱은 유창한 묘어를 구사하고 간단한 한어와 이족언어를 말할 수 있으므로 Pollard 선교사에게 묘어를 가르쳤다. 
많은 마을에서는 교회가 곧 학교였다. 건물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있지만 주일에는 예배당이고 평일에는 학교로 사용되었다. 학교는 사방에서 몰려온 교인들로 가득하였다. 운남성의 위현(威縣), 진웅(?雄), 초웅(楚雄) 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멀리 홍하(紅河)에 사는 묘족학생들도 몰려왔다.
1908년 Pollard 선교사가 질병 치료차 귀국 후 2,000 파운드를 모금하게 되자 석문감의 학교에는 벽난로가 있고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강의동이 세워졌다. 순도공회(循道公會)의 지원을 받게 된 후로는 석문감소학교에 기숙사, 강당, 축구장, 수영장 등이 확보되었다. 서양식 학교에서 묘족학생은 묘어, 한어(漢語) 및 영어를 배우고, 자연지리, 수학, 음악, 위생, 체육(농구, 축구, 수영 등) 등을 배웠다. Pollard 선교사와 그의 후임자들은 인문사회 교육만이 아니라 체육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교과목에는 일반적인 체육 외에 축구, 농구, 탁구, 배구, 수영, 등산, 육상, 기마, 가무(歌舞) 등이 교육되었다.
1910년, 성도공회 서남교구 묘강부(聖道公會西南?區苗疆部)는 묘족지구 교육사업을 전담하는 기구–교육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교육위원회에서는 석문감소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석문감 주변의 수십 개 지교회로 교육사업을 확장하였다. 1912년, 학교는 초급·고급 남녀 2부(部)로 발전하고 6년제 학제로 개편하면서 완전한 소학교 형태를 갖추고 교명도 광화소학교(光華小學)로 개명하였다. 1915년 Pollard 선교사가 소천할 때는 분교를 제외한 광화소학교에만 이미 학생 4백 명 정도가 재학하고 있었다.
광화소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가계가 곤란한 학생은 학비를 면제받았다. 이는 수많은 묘족, 이족 등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석문감 학교에서 제 1회 묘족 학생들이 졸업하게 되자 Pollard 선교사는 우수한 학생을 대도시로 진학시킬 것을 결정하고, 1913년 “유학생”을 묘족의 유사 이래로 처음 성도(成都)로 보냈다. 이 학생들은 졸업한 뒤 모두 석문감으로 돌아와 제 1대 묘족교사 혹은 의사가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석문감은 명실공히 “서남묘족 최고의 문화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Pollard 선교사의 학교 운영의 근본 목적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학교에는 기독교교리과목이 개설되었다. 매주 2-3시간의 교리과목 시간이 있었고 주로 성경이 소개되었다. 고학년 학생들은 소정의 성경말씀을 암송하여야 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저학년의 학생들에게는 엄격히 요구하지 않되 16세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매주 2차례 저녁예배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교사들 가운데는 전도자(佈道員)가 있어서 교육과 전도가 병행되었다. 학교는 기독교적 분위기가 강했다. Pollard 선교사가 석문감에 도착하여 처음 학교를 세울 당시에는 묘족 중 교사로 일할 수 있는 이가 없었지만 이후 학교는 거의 다 졸업한 후 타지로 진학하여 학력을 쌓은 묘족 지식인들이 교사와 교장으로 섬겼다. 물론 여교사도 포함되었다. 이로써 Pollard 선교사의 “이묘교묘”(以苗?苗)의 건학목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교사 소천 후에는 석문감 중고등학교가 세워지고 우수한 학교로 명성을 쌓았다.)
교회에서 몇 개의 학교를 지었는지는 정확하지 못하지만 석문감교구(石門坎?區)의 통계로는 50여 곳이고, 전·검·천(?黔川, 운남 귀주 사천) 접경의 몇 십개 현의 수치로는 100여 곳이 된다. (1950년 위녕현의 조사로도 교회학교는 28개였다.)

묘족문자를 만듬: 묘족은 당시 문자 없이 구전으로 그들의 역사를 전하였다. 문자의 창제는 이러한 역사를 종식시켰다. 1904년, 묘족인들이 Pollard 선교사를 찾아오면서 선교사는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서 묘족의 언어를 배우려고 했으며, 묘족에게 문자를 만들어주려고 시도하였다. 10월12일자 일기에는 “현재 묘족인들이 매일 오고 있다. … 오늘 나는 묘족에게 문자를 만들어 주고자 시도하였다. 우리의 자음과 모음으로 그들의 발음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는 순조로운데 어떻게 그들의 성조를 구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05年 선교사는 석문감에서 묘족 사역에 전념하면서 영어를 잘 하는 한족 교인 이스테반(李司提反) 및 묘족 교인 양야곱, 장무(張武) 등과 몇 달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영어를 근간으로 하고 묘족의 전통 의상의 무늬와 부호를 반영하여 간이 병음문자(“노묘문”(老苗文) 또는 “폴라드 알파벳”(波拉德字母)이라고도 칭함)를 만들었다. 이 문자는 오늘날도 여러 마을에서 사용되고 있다.
묘족문자를 창제한 뒤 Pollard 선교사는 교과서로 『묘문기초』, 『묘족원시독본』(苗族原始讀本) 등을 편역하였다. 『묘족원시독본』에는 기독교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과 함께 묘족의 역사, 시가, 이야기 등의 묘족의 문화와 과학 및 생활 상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묘어신문(苗文報)도 출간되었다.
Pollard 선교사의 묘족문자 창제는 묘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잘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문자를 이용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번역하였다. (소천 후 양야곱 등은 신약전서를 번역함)

풍습 개혁: 선교사와 한족 전도들은 묘족지역의 의식과 풍습 개혁에도 노력하였다. 묘족인들은 술을 좋아하고, 조혼의 풍습이 있었다. Pollard 선교사는 “절제회”(節制會)를 만들어 묘족 신자들로 하여금 술을 끊게 하고, “개량회”(改良會)를 만들어 15-16세에 조혼(早婚)하는 풍속을 개선하여 남자는 만 20세,녀자는 만 18세(남 22세, 여 20세)가 된 다음에 결혼할 것과 일부일처제를 장려하였다.
이밖에는 “사화산”(?花山), “숙채방”(宿寨房) 등의 민속을 제약하고자 교회는 1910年부터 오월 단오절기에 산 언덕에서 벌어지는 화산절(花山節)을 건전한 집단문예체육활동인 “동락회”(同樂會)로 개혁하고,운동회를 주요 항목으로 개최하였다. 경기 항목으로는 농구, 축구, 육상, 높이 뛰기, 멀리 뛰기, 줄다리가, 산타기와 묘족이 좋아하는 경마도 있었다. 이 운동회는 이후 인근의 모든 교회학교와 교구의 운동회가 되었다.
Pollard 선교사는 이밖에도 “평민교육”을 전개하였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성년들에게 지적·문화적 수준을 높일 것을 권하고 교회에 “평민학교”를 열고 운영하였다. 묘족신자들은 주일 예배당에 올 때는 예배할 뿐만 아니라 저녁에는 분반으로 공부하고 묘족문자로 된 『평민야독과본』(平民夜讀課本)을 통독하여야 하였다.
식생활 개선을 위해서 Pollard 선교사는 묘족에게 식탁 사용, 세수·세탁, 사람과 가축의 분리 거주, 화장실 사용법을 가르치고, 금주 등을 권하고, 묘족 공동체를 위한 저축조합(儲蓄社)를 세워 묘족이 단위별로 자금을 모아 토지를 구매하여 낙후된 생활을 개선토록 지도하였다. 이밖에도 묘족 신자들에게 집 짓기, 길 닦기를 가르치고, 직포기술 전수하고, 감자와 야채 및 나무 심기 등을 교육시켰다. 

약국, 한센병원 설립:
석문감 일대의 무속인(巫師)과의 두쟁에서 승리한 다음 석문감의 약국은 Pollard 선교사가 사는 거처(“五?小屋”, 5파운드 작은 집)에 자리잡았다. 이 약국은 예배당, 학교와 함께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 되었다. 예배 후 사람들은 이 약국으로 모여와 선교사 부인이 준비한 약품을 구했다. 당시에는 천연두가 유행하였다. 선교사는 고향에서 천연두 백신과 시술용 칼을 가지고 와서 무료로 사람들에게 접종을 해주었다. 또한 교회학생들과 전도자들에게 접종방법을 가르쳐 함께 천연두 퇴치에 노력하였다.
한센인은 과거 혐오의 대상이었다. 1914년 Pollard  선교사는 광서도독(廣西都督)이 한센병 환자들을 유인하여 산매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문을 통해 잘못을 비판하고,영국의 한 한센병예방단체의 도움을 받아 매월 정기적으로 식량과 옷감을 사서 이곳저곳을 헤매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나눠주고, 구걸하러 다니며 전염시키지 말 것을 권하였다. 1957년 귀주성공작조(貴州省工作組)가 석문감에서 현지 조사를 벌이며 기록한 묘족신자의 고백에는 “Pollard는 우리 묘족식구를 위해 고름을 치료해주고,한센병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Pollard 선교사의 갑작스런 소천으로 한센병원은 4년 뒤 후임으로 온 영국 선교사와 몇몇 묘·한 전도자들에 의해 세워지고 환자들이 마을을 이루며 집단생활을 함).
Pollard 선교사는 나아가 묘족의 위생과 건강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묘족 의료진(의사와 간호인력)을 육성하여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묘족학생들은 선발하여 성도(成都)의 화서협화대학 의대(華西協和大學 醫學院)에서 수학하도록 인도하였다. 학생들 가운데는 2명의 의학박사학위 취득자가 배출되어 묘족과 지역사회를 섬겼다. 오성순(吳性純)은 묘족역사상 첫 번째 의학박사이자 최초의 양의가 되어 묘족의 의료사업을 일구는 창시자가 되었고, 의학박사는 장초륜(張超倫)은 1949년 이후 귀주성인민정부(貴州省人民政府)의 첫 위생청 청장으로 활약하였다.

Pollard 선교사는 묘족의 생존권을 수호하는 데도 힘썼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위녕현 석문감지구의 묘족은 정치적으로 아무 힘이 없었다. 주변 민족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압박을 받고 있었다. Pollard 선교사는 그의 사역 속에 천부 인권 사상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그의 설교는 묘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역사의식과 함께 민족 평등을 쟁취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Pollard 선교사는 묘족을 자신과 동등한 상대로 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묘족인들이 멸시와 억압을 받지 않도록 지방의 관청, 토사(土司), 단신(團紳)들과 맞섰다. 그는 자신의 외국인 신분을 활용하며 이족(?族) 토목(土目)과 한족 지주 등이 묘족인을 유린할 때는 좌시하지 아니하고 관청에 진정서를 보내거나 혹은 해당 관청을 찾아가 관청의 힘으로 만행을 멈추도록 요청하고, 자신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나아가 묘족인들을 보호하고 구출하였다. 예를 들면 1906년 운남성 동부와 귀주성 서부의 묘족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가 날로 많아지자 이 지역 토목들이 묘족을 대규모로 박해하고 묘족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 때도 Pollard 선교사는 한족 전도사들과 함께 관청과 교섭하며 사태를 수습하고 감옥에 가서 갇힌 묘족인들을 구출하였다. 

이상의 사역의 특징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Pollard 선교사는 묘족인과 하나된 삶, 묘족인에게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이는 삶이 있었다. 선교사는 영국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중국의 서남방, 빈곤한 오지이며 높고 한랭한 산지에서 20여 년간 사역을 지속하였다. 상이한 두 문화의 이질감과 충돌로 인해 선교사는 소통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중국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그를 좌절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절망하는 동료를 권면하며 사역에 힘썼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10년은 그야말로 묘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본을 아낌없이 나타내는 삶이었다. 그는 석문감에 도착한 뒤 거친 마포로 만든 묘족 복장을 입고 짚세기 신을 신고 묘족인들과 함께 먹고 걷고 함께 살았다. 묘족인들의 소박하고 불결한 생활환경에 자신을 철저히 “묘화”(苗化)시켰다. 또한 그는 언제나 묘족인들을 존중하며 예를 갖추어 대했다. 길에서 묘족인을 만나면 항상 어른을 마주하듯이 길을 양보하고 “실례합니다”(得罪)라고 말하였다. 또한 묘족을 보호하는 삶으로 인해 수차례 구타당하고 암살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의 선교적 사명과 묘족에 대한 사랑을 흔들지 못하였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인 대화묘(大花苗)를 대하는 그의 진실된 삶은 묘족으로부터 선교사, 교사, 의사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라멍”(拉蒙 즉 묘왕(苗王))으로 존경을 받았다.
Pollard 선교사의 묘족 사랑은 1905년 가을 묘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흑병”(黑病, 장티푸스)이 석문감 일대에 창궐할 때도 변치 않았다. 묘족인과 학생들이 쓰러지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타지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Pollard 선교사는 그의 아내와 함께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 않고 묘족 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죽을 끓여 먹이고 밤낮으로 치료하며 학생들을 지켰다. 9월15일 Pollard 선교사는 과로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석문감에서 51세로 소천하였다. 청천벽력과 같은 슬픈 소식을 접한 묘족들은 어버이를 잃은 것 이상으로 애통해 하였다. 묘족들은 선교사가 우리의 아버지보다도 우리를 더 사랑하였으니 우리 손으로 장래를 치루자고 결의하고 장래식을 거행하였다. 장례 행렬에는 묘족, 이족, 한족 등 수 많은 사람이 통곡하며 따랐다. 하장한 다음에도 많은 묘족인들은 며칠씩 묘를 떠나지 않았고,자신도 죽게 되면 선교사 옆에 안장할 것을 유언하고 선교사 주위에 잠들었다. 묘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Pollard 선교사를 묘족인들은 “묘족의 구원자”(苗族救星), “묘족의 아버지”(苗族之父), “라멍”(拉蒙, 즉 묘왕)등으로 호칭하며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하고 있다.
이상으로 Pollard 선교사의 중국선교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시대와 지역이 달랐지만 Pollard 선교사의 선교의 발자취는 마치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떠오르게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

이글을 통해서 현장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에게 경의를 드리고, 우리 모두 Pollard 선교사의 사역과 삶을 잇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우심화 교수(ACTS)

선교타임즈 2012.03월호

 

One Response to [collection]Samuel Pollard(伯格理)와 석문감

  1. 很强大!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