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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FM] 하나님의 거할 처소 : 가정교회

김의원

1. 현장의 변화: 새로운 사역을 요구하는 토양

1.1 문제점: 이대로는 어렵다!!!

수년 전부터 교회성장1)과 개척이 둔화되어갈 뿐 아니라 교회주변의 상황2)이 급격하게 변화되면서 이에 적응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걱정이 많다. 교회가 거의 개척되지 않고 성장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사회현장의 급변, 교인들의 안이함, 지도자들의 한계, 혹 교회의 구도 등3) 자칫하면 교인들은 지도자들의 능력을 탓하게 되고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안이함을 탓하거나 주변상황의 변화로 돌리면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변명하려 든다. 현금의 문제를 어느 한편만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시대적인 문제로 여기고 지나쳐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지난 이천년간의 교회역사를 되돌아보면, 복음은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의 문제가 아니다.

해결방안은 변화된 주변상황과 맞물린 교회구도와 형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문제없이 받아들여진 교회구도가 새롭게 급변해 가는 정황에 잘 맞지 않다는 데 있다.4) 여기에 교회 패러다임5)의 전환이 요구되어진다. 성경적 교회형태는 성경에서 찾아낸 신학적 원리에 따라 사역현장인 한국사회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함께 연구되어 꽃피워지는 것이다. 현재 교회형태는 성경의 신학적 원리를 오랜 전의 한국사회에 적용된 것이라면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교회형태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의 출현은 낡은 사고, 낡은 모델,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의 단절로부터 이루어진다. 교회도 역시 낡은 모델, 낡은 패러다임을 단절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 방법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의 시각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1.2 기능과 형태

Robert Nesbitt는 사회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다: (1) 사람들은 형태를 고착시키려 한다. 형태가 변화되면 사람들은 안정감을 잃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하였던 방법을 계속함으로 안정을 꾀하려 한다. (2) 사람들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만 형태를 변화시킨다. 위기를 당하면 기존 형태와 방법이 맞지 않게 되어 다른 형태와 방법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석유 파동이 생길 때 대체    에너지-태양열, 지열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진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일반 사람들이 갖지 않는 다른 문제가 있다. 우리는 형태를 바꾸고 싶지 않다고 말함으로 우리의 불안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곧 “형태를 변개시키면 성경의 진리를 변개한 셈이 된다.” 형태 자체를 성경적 진리와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에 절대와 상대, 불변과 가변 곧 기능과 형태 사이에 혼돈이 있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개혁자로서 일해야 한다. 개혁자로서 우리는 교회의 주어진 기회를 감당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좋은 예가 성경에 나타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비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십니까?” 예수님은 참 문제의 소재, 곧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이면을 아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전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응답하였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리라”(눅 5:37-38).

예수님은 본질적인 기능(포도주)과 이에 따른 형태(가죽부대)를 구별하고 있다. 우리는 포도주와 가죽부대와의 관계, 곧 어떤 종류의 가죽 부대가 현대의 기술, 산업, 정보사회에서 적당한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 복음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 노력한다. 부대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대도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이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변화를 초래하고 변화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낡은 부대는 터져야 하고 새로운 부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사람이 있는 곳은 항상 기능과 구조가 있게 마련이고 기능과 구조가 있는 곳은 형태가 따른다. 기능과 형태는 연결되지만 구분되어진다. 사람들은 “무엇이 교회의 진정한 형태인가?”라고 물을 때 대부분 교회의 진정한 기능과 원리를 묻기보다는 항상 기능을 가져다주는 형태, 패턴, 조직체, 방법, 프로그램, 구조의 영역에만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교회의 형태는 어떠해야 할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이 명시하는 교회의 기능을 담당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인가? 교회에 대한 최선의 형태와 최선의 구조, 그리고 가장 좋은 접근방법은 무엇인가?

1.3 교회의 네 유형

교회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스나이더 84ff):

(1) 지체 교회(The Body Church): 신약이 제시한 경험에 가장 가까운 모델이다. 이 교회 구조는 함께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리는 경험으로 서로 연대감을 갖는 작은 그룹들의 그물(network)에 기초한 광범위한 조직이다. 이런 교회는 가정이나 학교 또는 홀 등 이용 가능한 모든 시설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조정하는 형태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작은 세포의 끊임없는 분열과 확장을 통해 사회에 깊은 충격을 가하면서 무한적으로 성장하며 삶을 지속하여 나아간다.

(2) 건물교회(The Cathedral Church): 이런 교회는 건물을 교회라고 간주한다. 그 건물이 교회의 전체 프로그램과 생활 양식을 완전히 결정짓고 만다. 이런 종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다.

(3) 장막교회(The Tabernacle Church): 이 교회는 건물을 가지고 있으나 그 건물은 엄격하게 부차적이고 기능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건물은 거룩한 곳이 아니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필요한 장비에 불과하다. 건물은 융통성 있게 지어졌고 다목적으로 사용되어진다. 이런 교회는 환경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인 장막이나 천막처럼 건물을 간주하기 때문이다.

(4) 유령교회(The Phantom Church): 이 교회는 건물이 없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어떤 종류의 구조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교회는 상호책임성이나 조직적 상호관련성을 갖는 몸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 조직이 결여되어 있어 안개처럼 증발해버리거나 자신의 구조를 강화하여 모임을 조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상기의 교회유형들 가운데 지체 교회(#1)가 가장 성경적이며 장막교회(#3)는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 모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여 있는가? 스나이더는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어느 교회든지 밖으로 성장하는 일보다는 건물에 더 많은 돈을 소비하고 모아진 것은 모두가 오로지 교회 안에만 있도록 붙잡고 있으며, 선교와 전도를 하기에 앞서 건축에 열을 올리며, 그 건물을 거룩한 기능 외에는 어떤 다른 일에도 사용하지 않고 사면의 벽에 갇혀 있는 사람 수로써 영적 깊이를 재는 그런 교회는 큰 건물 열등의식(edifice complex)에 잡혀 있고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건 간에 거의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교회이다”(스나이더 87).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처럼 전통적인 교회건물이 시대 착오적인 무용지물이며 교회는 더 이상 건물에 집착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의 공동체가 결코 어떤 재물이나 건물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재물이나 건물이라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되고 교회의 본질은 성경이 제시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교회건물은 기능적이며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1.4 교회 현장에 대한 연구: 한국 교회의 성장 패턴

성경적 교회의 기능과 형태를 논하기 전에 한국교회의 성장의 상황적 요인과 더불어 성장의 패턴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4.1 한국교회의 성장의 상황적 요인

정치적으로 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수 십 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와 권력의 장기화, 집중화, 절대화가 있었고 정치억압, 인권탄압, 관료적 권위주의로 특징이 지워진 정치부재의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반공, 안보, 성장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긴장과 불안을 가중시켰다. 오히려 이런 정치적 상황이 교회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져 왔다. 산업구조가 농업과 같은 일차 산업에서 공업, 제조업의 이차 산업, 전문업, 서비스업의 삼차 산업으로 옮겨가면서 농촌에서 도시에로의 인구이동인 활발해졌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공동체의 상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 정체성의 위기, 계약적이고 공리적이며 타산적인 인간관계의 확산, 사회통제력의 약화, 도덕성의 실종과 같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연대감이나 소속의식이 약화되어 도시인을 ‘고독한 군중’으로 만들었다. 또한 도시의 거대한 조직과 기구는 관료화되고 제도화된 틀 안에서 각 개인은 개성과 정체성을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교회는 한국사회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안팎으로 전개되었던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엑스플로와 같은 대규모의 전국 복음화 운동과 맞물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유입되게 된다. 당시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이전으로 인한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사람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쉽게 공동체성의 붕괴와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였다. 종교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성과 정체성을 마련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소속의식을 제공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함으로 그들을 결속시키고 생활에 만족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화로 인하여 공동체성과 정체성을 상실한 많은 한국 도시인들에게 종교는 큰 힘이 되었고 이에 따라 종교의 성장이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6)

1.4.2 한국교회의 성장의 패턴

교회성장을 말할 때 먼저 공급자(Feeders)와 수용자(Receptors)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공급자’를 교회의 일꾼들을 훈련시켜 내어 보내는 교회 내지는 그룹으로 본다면 ‘수용자’는 이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나 그룹을 뜻한다. ‘공급자’의 역할이 활발하면 할수록 ‘수용자’의 규모는 확장되어진다. 한국교회의 지난 역사를 살피면 다음 두 방향에서 ‘공급자’와 ‘수용자’의 역할을 읽을 수 있다.

(1) 농촌교회에서 도시교회로: 한국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수많은 농촌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던 많은 교인들이 직장을 따라 도시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도시교회들은 이주교인들로 인하여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이처럼 농촌교회가 공급자가 되어 교인들을 공급하였고 도시교회는 수용자가 되어 이들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급격한 교인유입으로 기존의 도시교회들이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되자, 교회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1) 다중 예배, (2) 교회 증축, (3) 종교부지와 상가를 중심한 교회 개척. 세 경우 모두 건물을 통한 성장 패턴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교회들은 늘어가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2부 예배, 3부 예배 등 한 장소에서 여러 번의 예배를 드리면서 기존 건물을 통한 교회성장을 추구하였지만, 계속 늘어가는 교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교회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교회들은 한 장소에서 3-4번에 걸친 증축을 하기도 하였다.

(2) 상가교회에서 대형교회로: 8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에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자, 기존의 도시규모로 그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행정당국은 신도시 건설를 통해 이를 해결하였다. 이에 편승하여 일부 교회들은 신도시 아파트 내의 종교부지를 구매하여 교회를 이전시켜 성장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미처 부지를 구매하지 못한 교회들은 신도시 주변 상가를 구매하거나 임대하여 교회들은 개척하였고 시대에 맞추어 열린 전국 복음화 열풍을 통해 신입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건물을 매개로 한 교회의 성장 패턴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상가교회 개척 →교인 증가→교회 부지 구매→교회건물 신축→다중예배→교회건물 증축→다중예배→교회건물 재증축으로 이어지면서 대형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교회를 제외한 많은 교회가 수적 성장 배후에 영적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그 결과 교인들은 전도의 열정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더 이상 교회개척이 여의치 않게 되고, 또 교회당 신축이라는 경제적 부담을 갖지 않으려는 상가에 있는 작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대형건물과 많은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대형교회로 옮겨 앉게 되었다. 이 경우 상가에 세워진 많은 작은 교회들은 ‘공급자’가 되고 대형교회들은 ‘수용자’가 되었다. 앞서 농촌교회와 도시교회 사이에 주어졌던 관계가 이젠 상가의 개척교회와 대형교회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이로 인해 대형교회는 더욱 대형화되었지만, 반면 정착에 성공한 일부 개척교회를 제외하고 많은 개척교회들은 수적으로 더욱 빈약하게 되었다. 최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더 이상 교회들은 개척되지 않는다.7) 그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은 더 이상 ‘수용자’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공급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방법으로 ‘공급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 교회의 성장은 더욱 축소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살핌으로 교회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새로운 ‘공급자’의 개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1.5 교회와 건물과의 상관성

급성장하였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면에서 한국교회는 이제까지 “교회 = 건물”이란 도식을 중심하여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의 대형화 심리와 건물 중심 지향 심리는 한국교회 성장의 한 원인이었다. 경제의 발전과 산업의 발전은 급격한 사회변동을 가져왔고 농경사회에 살던 한국인으로 하여금 산업사회로 이동하게 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도시화 현상은 가속화되고 도시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성장 추세를 보였다. 더구나 대형화 심리는 대형교회를 선호하게 함으로 대형교회의 교적을 가진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 많은 교회가 증축을 하거나 개척하면서 적절한 장소를 마련하여도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개척교회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교회 = 건물”이라는 도식의 정당성을 살펴보자. 한동안 “교회 = 건물”이란 도식은 한국교회 성장의 축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교회는 증축을 통해 더 큰 교회를 지을 수 있었으며, 한민족 복음화의 여파로 수많은 불신자들이 상가에 세워진 개척 교회에 등록하였었다. 90년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교회개척이 눈에 띄게 적어진 사실에서 비추어 볼 때, 이젠 “교회 = 건물”이란 도식이 깨트려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다른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교회개척을 언급할 때 건물이 아닌 다른 개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주어지면 형태에 관한 질문보다는 기능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되어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갔던 초대교회의 정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당시 유대교인은 큰 규모의 회당과 할례를 자랑하였고 이방인들은 거대한 신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자랑할만한 건물을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은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온 세상을 변화시켰으며, 큰 건물을 자랑하였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가득 채워졌다.

“주후 약 200년경까지는 기독교인들은 교회건물을 지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교회 건물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숫자적 성장이나 영적 깊이 어느 것에도 본질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초기 시대의 교회는 숫자적 증가와 영적 깊이를 성공적으로 성취하였고 교회 역사상 교회가 패기와 성장의 활력에 넘쳤던 위대한 기간은 첫 두 세기였다. 바꾸어 말한다면 교회가 건물의 도움-또는 방해-을 받지 않던 그 때에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였다는 뜻이 된다”(스나이더 75-6).

만약 초대교회처럼 교회의 건물이 성장이나 영적 깊이에 필수적이 아니라면, 왜 오늘날의 교회들은 그렇다고 건물에만 치중하고 있는가? 스나이더(76f)는 이를 교회가 “큰 건물 열등의식”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교회건물이 가져다주는 잘못된 의식을 지적하였다:

(1) 교회의 건물은 우리의 부동성(our immobility)의 증명이다.

(2) 교회건물은 우리들이 융통성이 없다는 사실(flexibility)을 증명한다.

(3) 교회건물은 우리들 사이에 교제가 별로 없다는 증거가 된다.

(4) 교회건물은 우리들의 자만심(pride)을 나타내는 증명서이다.

(5) 교회건물은 우리들의 계급의식을 증명해준다.

곧 교회건물은 교회가 활동성이 없고 융통성이 없이 경직되어 있으며 친교가 부족하고 자만심과 계급의식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할 뿐이다. 또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인하여 교회개척이 더욱 어려워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 = 건물’이라는 공식을 제쳐놓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교회관 : 교회는 ‘제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2.1 교회개혁과 변화

새 시대에 맞는 교회로 변혁되려면 교회에 관한 지금의 의식이 어떠한지를 정의해냄과 아울러 개혁하고자 하는 고급 품질(?)의 의식 곧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8) 21세기를 들어선 우리는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개혁의 기초가 되는 “교회관”에 대한 연구를 선행하여야 한다. “교회관”에 대한 새로운 구도를 제시함으로 구도의 변화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생각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왜 새로운 교회관이 요구되는가? 21세기에 들어와 급변하는 현장 때문이다. 특히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본격적인 멀티미디어와 인터넷과 사이버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제 곧 재택 근무와 사이버 학교 시대가 열릴 전망이고 모든 공동체적 모임이 사이버 공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교회도 이 조류 앞에 예외가 아니다. 사이버 교회와 화상 예배와 인터넷 심방과 상담, 설교, 교제, 전도, 기도 등의 거의 모든 교회의 신앙 영역들이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점점 공동체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문제를 영적으로 감지하고 대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2.2 구속사에 나타난 교회

구속사에 나타난 교회의 좋은 그림은 시내 산에 천둥과 번개 속에서 강림하신 하나님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의 회집에서 엿볼 수 있다(출19장).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자신이 거할(שבו, 샤칸) 장막을 짓게 하고(출25:8) 완성된 뒤에 그곳에 거하신다. 시내 산과 후에 장막에 모인 백성을 קהל(카할)로 표기하였고 이를 LXX에서 ekklesia(에클레시아)로 번역하였다. 또 장막은 하나님이 백성들 중에 거하시는 처소로서 한 장소보다는 이동성에 특징을 갖는다. 장막은 한 장소에 세워지기보다는 백성들이 이동할 적마다 다른 곳에 세워진다. 곧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는 어느 특정한 장소 – 예를 들면 예루살렘 – 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출 29:45-46). 이처럼 교회는 어떤 장소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강림하신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 곧 백성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표현되어진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거하신다.

이런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부분이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변증이다. 이 부분을 중심하여 구속사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요약하려 한다.

스데반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한 이후 산헤드린 앞에서 변증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의 축-율법과 성전-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성전을 헐라고 말한 것은 그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스데반과 변론하였으나 능가할 수 없어 거짓 증인들을 세워 그를 고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짓 증인들의 고소 내용은 두 가지의 신성모독죄였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 한 것’, 즉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는 것’(행 6:11, 13).

두 가지의 모독죄로 고소된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이 잘못된 것들이라는 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과 그것들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변증하였다.9) 곧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특정한 처소, 곧 예루살렘과 관련되지 않았으며 다만 백성들과 관련되었다고 말한다.

1) 족장 시대(2-16절):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는데 모두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탈 예루살렘 사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요셉과 더불어 애굽에서 사역하셨다는 보고를 통해 스데반은 어느 한 곳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족장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곧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 뿐 아니라 어떤 처소에서도 가능하다. 스데반은 거룩한 장소가 있기 전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을 부르셨다고 변증하고 있다.10)

2) 모세 시대(17-43절): 스데반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던 장면을 설명한다(29-34절). 하나님은 “때가 차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말한다. 출 3:5의 인용문이 갖는 중대성은 크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시내 산의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밝힌 후 하나님이 나타난 땅이 거룩한 곳임을 강조한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시내 산의 “그 곳”도 성전과 같이 거룩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나라 바깥에 거룩한 땅이 있다는 것이다.

장소의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로 성립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한 곳에 매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중심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지구상의 그 어떤 곳도 본래부터 스스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Bruce 187). 스스로 거룩한 곳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임재만이 그곳을 거룩하게 한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3) 장막과 성전 시대(44-50절):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44)과 ‘솔로몬이 지은 집’(47)을 비교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장막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44)으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다윗 때까지 국가 생활의 중심점으로 지내왔다(45b). 다윗이 영구적인 전을 짓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47). 둘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어진 것이기에 장막이나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스데반은 그것들이 어떤 문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48).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순례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이 아직 이교도의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으며(2), 하나님이 요셉이 심지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계셨으며(9),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오셨으며 그럼으로 그 장소를 거룩한 땅으로 만드셨으며(30, 33), 비록 광야에서 하나님은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셨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계시지 않는다’(48)는 것이다.11) 만일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집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백성 가운데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궁극적인 성소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으며 예수가 이를 이루었다.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장막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점진적인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를 통해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겠다는 것이라고 변론한다.12)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승천하신 영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성전이라고 권면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더 나아가 바울은 믿는 자들의 모임을 유기적 조직으로 구성된 교회로 말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1);

2.3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모두 다루기에는 지면상의 제한으로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고넬료 기사(10:1-11:18)를 중심으로 성전 예배가 가정을 중심한 교회의 모습으로 전환된 것을 살피려 한다. 곧 유기적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모임의 장소로 성전이나 회당이 아닌 가정의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고넬료 기사는 타민족 선교를 알리는 전환점이다. 누가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가정-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바울을 도입한다. 또 룻다와 욥바(행 9:32-42)의 가정-사역 이후 베드로는 이방 선교의 문을 연다(10:1-48). 누가는 표면에 고넬료의 회심을 말하나 베드로의 이방 선교에 대한 상징적 세계로의 변환을 예증하기 위해 베드로가 겪었던 다른 종류의 회심을 언급한다. 이처럼 베드로의 세계관의 변화없이는 고넬료의 회심은 불가능하다.

(1) 고넬료와 하나님의 천사(1-8절): 고넬료는 구제와 온 가족과 더불어 기도에 힘쓰는 자로 소개되었다(2절).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는 성전을 방문하였으나 직접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전의 예배 시간에 온 가족과 더불어 집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방인인 그의 집에 하나님의 천사가 방문하여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10:4, 31)고 말한다. 여기서 ‘기억하신 바’는 레위기가 말하는 소제의 기념물을 비유적으로 암시하는 제의적 용어로서, 고넬료의 구제와 집에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것은 이 행위를 성전에서 드려진 제사와 동등하게 여겨진 주된 상징이다(정용성, 287). 이처럼 사도행전 저자는 이방인의 집, 세속 공간을 유대인의 성전의 거룩한 공간과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2) 피장의 시몬의 집에서 환상을 본 베드로(9-23절): 사도행전 저자는 지역적으로 지중 해변의 헬라화된 욥바와 가죽장이 집을 이 기사에 놓음으로 이방인과 기독교 지도자의 사회적 만남이 문제라고 말한다. 특히 사체의 가죽을 만지는 가죽장이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부류이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열 수 있는 엄청난 이상을 보았다. 곧 유대교의 식이법을 하나님이 파기한 것이다. 이 법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먹는 일에 규정하고 있으며 또 성전의 성결의 정도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상에서 온갖 종류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보았으며(12절) “(제사드려) 잡아 먹으라”(θυσον και φαγε)”(13절)라는 명령을 들었다. 이 용어는 제사장들이 행하는 제의적 행위를 암시하는 제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성전이 아닌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제의적 행위를 이루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정용성 288). 사도행전 저자는 신적 명령에서 집을 성전을 대체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곧 성전 공간은 가정, 집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3)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찾아간 베드로(17-43절): 하나님은 이방인의 집에 가기를 꺼려하는 베드로에게 지체함이 없이 들어가라고 명한다. 베드로는 자기가 거처하던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 이방인들을 초대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 이방인의 사회공간으로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유대교 결례법이 비합법적으로 되었음을 설명한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말한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28절). 하나님의 명령으로 할례자가 비할례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베드로는 모든 나라의 누구에게나, 곧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도록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으로 초대되었다(34-43절).

(4) 고넬료의 모든 집안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베드로(44-48절): 설교 중에 성령이 전 집안에 부어졌다. 어느 누구도 이방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견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믿어 새 신자가 되면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들을 자신의 가족에 포함시켰기에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제 고넬료의 가족, 곧 육적 자손, 친족, 친구와 종들과 신실한 군인들이 계급적인 가족 구도를 형성하였던 것 같이 하나님의 가족에 통합되었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임재하신 것으로 여겨졌던 하나님께서 이제 가정집, 그것도 이방인의 집에 오셔서 복음의 문을 여신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민족과 장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을 통해 확장되어진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주요하게 사용된 공간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가정집이었다.

2.4. 신약에 나타난 가정교회

신약의 네 곳에서 가정에 모인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1) 바울이 에배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된 내용: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συν τη κατ‘ οικον αυτων εκκλεσια)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2) 3년 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την κατ‘ οικον εκκλησιαν)”  (롬 16:3, 5).

(3) 생애 마지막 시기에 감옥에서 바울은 친구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 아마 그의 아들인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τη κατ‘ οικον σου εκκλησια)라고 서두에 기록한다(몬 1:2).

(4) 마지막으로 골로새에 보낸 편지에 바울은 눔바에게 문안하면서 “그 여자 입에 있는 교회”(την κατ‘ οικον αυτηϛ εκκλησια, 골 4:15)라고 적는다.

이 본문들은 바울이 개인 집에 모였던 기독교인들의 회집을 말하면서 가정교회라고 명확하게 밝힌 것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가정 배경에서 모인 가족들이 교회였다. 이런 가족 관계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직분과 구조를 갖게 되었다. 바울의 사역 밖의 초기 기독교 그룹도 가정집에서 모였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아마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정교회의 증거가 보인다. 누가는 가정 모임을 예루살렘 신자들을 유대인-비기독인들과 구분하는 행위로 기록한다. 이들은 ‘집에서(κατ’ οικον) 떡을 떼면서’(행 2:46; 참. 5:42)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여기서 기독교인의 집은 유대 성전과 정확하게 대조된다.

개인 집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인 것은 회당이 모임의 장소가 될 수 없고 이방 신전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가정집은 초대 교인들이 모일 수 있는 친밀하고 안정된 장소였다. 일세기 동안 가정집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삶을 형성하여 경제적인 하부구조로 선교사업의 근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정집 특히 식당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의 장소로 ‘비거룩한 장소’인 ‘다락방’을 선택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초기 자기 정체성을 말해준다.

때로 이세기 후반에 기독교인은 자신의 집을 교회 모임으로 헌납하여 독자적 건물로 사용하였다. 구도가 변화되어 식당을 더 큰 회집의 홀로 바꾸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314년 밀란 칙령이 발표된 일 년 뒤 첫 성당(basilica)이 나타난다. 헌납되어 독자적 건물로 사용된 교회나 성당(basilica)에서 모인 기독교인의 모임은 가정교회에서 모인 것과는 다르다. 지도력은 몇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 거룩한 지도자 계급이 생겨난다. 교회 사역은 전형적인 제의가 되어 공동체보다는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갔다. 서서히 가정교회는 건물 교회로 변해 갔다.

2.5 교회는 ‘제도’(institution)일 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지체’(body)이다.

교회는 조직체(organization)임과 아울러 조직(organism)이다. 이제까지 관심의 초점은 조직이 아닌 조직체로서의 교회였다. 현재 우리는 그 한계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조직체가 아닌 조직으로서 연구되고 구현되어져야 한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내재하는 임재로 인하여 활력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 백성들”이다. 신약에서 교회는 조직체나 제도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교제,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언급되어 있다.

3. 교회구도의 변화: 변형교회(Meta-church)로서의 가정교회

3.1 교회 크기에 따른 구조(참. George 81)

1) 쥐 크기의 가정 그룹(5-30인)

2) 고양이 크기의 작은 교회(50+)

3) 애완견 크기의 중간 교회(100+)

4) 마당개 크기의 큰 교회(200-1,000) – 5%

5) 말 크기의 대형 교회(1,000-3,000) – 1%이하

6) 코끼리 크기의 초대형 교회(3,000-10,000) – 0.1%

7) 변형교회(Meta-Church)

변형교회는 작은 크기이건 대형 크기이건 크기에 관계없이 수많은 쥐 크기의 가정 그룹으로 이루어진 교회로 말할 수 있다. 곧 가정에 기초를 둔 작은 신자들의 모임이다. 변형교회는 초대형 교회와 전혀 다르다. 이 새로운 명칭은 때로 더 많은 교인수를 가진 교회를 가르치지만 그 초점은 변화에 있다. 곧 “목회방식에 대해 목회자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교회가 수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직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George 80).

3.2 전통적인 교회와 변형교회의 비교

전통적인 교회와 변형교회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차이점을 말할 수 있다:

3.3 전통적 교회

전통적 교회는 건물 중심이고, 예배 중심이다. 예배 중심 교회의 공통적인 문제는 네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참. 최영기 23-38): (1) 참된 사귐이 어렵다. 예배당의 설계가 목회자와 온 교인 간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을 기초한 말씀전달 구조가 되어, 교인들 서로 간의 교제가 어렵다. (2) 교회 내의 직책들이 한정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 어렵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은 소수만이 자신들의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교회구조를 갖고 있다.13) (3) 불신자 전도가 어렵다. 교회는 “병자들을 위한 병원 이라기보다는 성자들이 노는 호텔”이 되어 불신자들이 교회 내의 구조에 끼어들어 오기 어렵다. (4) 성장과 더불어 건물을 계속 확장하여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서 강조하는 가정교회, 곧 변형교회로서 가정교회로 되돌아가야 한다. 모든 성도가 다 목회자들로 목사들과 같이 헌신되어 신도들을 맡아서 자기 집에 모이면서 목회를 하였다. 좋은 예가 앞서 언급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행18:1-3), 눔바(골4:15), 빌레몬(몬1:1-2)이다. 곧 이들 집에서 이들을 지도자로 하는 가정 교회가 모였음을 보여준다. 최근 실질적인 좋은 예로 중국의 처소 교회를 들 수 있다. 1949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엄청난 탄압이 시작되어 교회는 폐쇄되고 목회자들은 구금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추방을 당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기독교가 존속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중국이 개방한 뒤 기독교가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수가 오히려 몇 배가 증가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증가는 가정교회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회당이 없으니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고 목회자가 없으니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었고 성경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핍박 가운데서도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중국의 처소교회는 가정교회가 21세기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임을 증명해 주었다. 가정교회는 신약 성경 시대의 교회일 뿐 아니라 현대에서 아주 유용한 교회형태임을 입증해 주었다.

3.4 실제적인 관점에서 본 가정교회

가정교회는 구역이 아니다. 후자는 친교에 국한된 교회의 부속 기관이나, 전자는 그 자체가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최영기 69). 또 조직 면에서 구약은 같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묶어서 형성되나 가정교회는 지역에 상관없이 회원의 선택에 의하여 형성된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가정교회를 선택했음으로 가정 교회 구성원들끼리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삶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을 갖는다. 또 가정교회는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을 주된 활동으로 한 순모임이 아니다. 후자는 믿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자는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예수를 만나도록 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목적이다. 순모임이나 제자훈련 모임은 성경 공부를 통해서 제자를 만들고 가정교회 모임은 삶을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든다.

최영기는 가정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가정교회는 한마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다른 소그룹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장년 주일학교처럼 성경공부가 주 목적은 아닙니다. 제자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나 순모임처럼 성경공부에 의존하는 제자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친교를 갖습니다. 그러나 구역모임처럼 친교를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모임처럼 기도가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내적 치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단주협회와 같이 치유가 주된 관심사는 아닙니다. 가정교회는 지역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골고루 다 하는 지역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다”(최영기 70-71). 한마디로 말하면 가정교회는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의 사역을 가진 ‘개척 교회’와 같다.

3.5 가정교회의 장점

가정교회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열려진 공간으로 먼저 믿는 자들이 모범을 보임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갖는다: (1) 서로의 삶을 나눔으로 성도간의 구체적인 도움이 가능하다; (2) 신뢰할만한 사람들 틈에서 자기 노출이 가능함으로 내적 치유가 가능하다; (3) 불신자에 대한 전도가 가능하다. (a)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주는 따뜻한 분위기와 (b) 신자들의 온전한 섬김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는 사실을 통해 서서히 기독교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4) 마지막으로 가정교회 요원들 하나 하나가 사역자가 됨으로써 모든 성도의 제자화가 가능하다. 가정교회는 교인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섬기는 성숙된 공동체를 통해 불신자들을 위한 구령사업에 사역하도록 하는데 큰 장점이 있다.

4. 요약과 결론

어떤 성도들은 교회를 “예배를 드리는 건물”로 생각하여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은 좋은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어떻게든지 교회건물을 크게 지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여겨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생활은 교회의 각종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교회의 한 부분만을 강조한 셈이다. 또 신학적으로 교회의 정의를 말할 때 두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의 넓은 의미로 “모든 세대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하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이런 정의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에 대한 정의만큼 현대 교회로 하여금 역동적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구절을 찾으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나타난다. 마 16:17에서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닌 가정의 모임을 통해 머리되신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엡 1:23). 그 지체는 조직적인 지체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서로 연합되어 서로 성장하는 지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지체로서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보이는 교회건물을 짓는데 온 힘을 쏟게 하거나 교회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국한시키기보다는 영적 생명을 나누는 지체로서 서로 돌보고 도와주는 역동적인 교제를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사역이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작은 변형교회로서의 가정교회이다.

이 개념을 기존교회 내에서 활용한다면 ‘교회내의 작은 교회’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구역을 가정교회로 바꾸어 교회성장에 필요한 ‘공급자’로 활용하여야 한다; (2) 교회내의 작은 교회로서 청년부를 독립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기존교회는 교회구역 조직을 상명하복을 기초한 작은 행정 조직이기보다는 작은 변형교회로서 독립적 사역을 담당하는 가정교회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역장14)은 목회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지도자이기보다는 스스로 목양자가 되어 관계전도를 통한 불신자를 복음화시키면서 이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또 사역을 구역장이 독점하기보다는 구역원 모두에게 사역의 일부를 일임시켜 각 지체로 서로 돌보고 도와주는 역동적인 조직체로 만들어야 한다. 성장되면 구역을 분가시킴으로 재생산을 통해 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둘째, 교회에서 연령층 사이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청년부를 작은 변형교회로 독립시켜 ‘교회 내의 작은 교회’로 만들 필요가 있다. 곧 청년부를 행정적으로 재정적으로 독립시켜 이들의 지도자는 행정적으로 교회의 부교역자이지만 자체로서 담임목사로 사역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물론 교회의 대표권은 위임목사에게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 교회당 내에 두 개의 교회를 만들어 서로 유기적으로 사역을 나누어 담당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오는 세대의 미래사역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 개념을 새로 교회를 개척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지도자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교회당을 준비하기보다는 가정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적 지도자는 여러 가정들과 더불어 성경을 공부하면서 삶을 나누어 가는 가정에서 작은 교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교인이 수적으로 증가하면 이 그룹을 훈련된 평신도 부지도자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시 새로운 가정교회를 개척하여야 한다. 이런 그룹이 여러 개로 성장하게 되면 작은 공간을 빌려 교회로 시작할 수 있다. 이때 교회 건물은 모든 교인이 앉을 수 있는 큰 공간일 필요가 없으며 각 그룹이 함께 모일만한 공간이면 족하다. 작은 공간이라도 각 가정교회가 서로 독립된 교회처럼 이 장소를 시간별로 여러 번 나누어 임대하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대형교회에서 행해지는 다중예배와 다르다. 한 교회당에서 다중 예배가 진행되지만 각 그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교회이다. 물론 목회자가 각 그룹의 예배를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변화되는 현장 속에서 복음 사역과 교회개척에 대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에 병행되어 교회론에 관한 더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 교회를 건물개념으로 국한시켰을 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현재의 구조 내에서 교회는 개척되기에는 너무 버거운 모습이 되어 버렸다. 부교역자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해도 너무 큰 비용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이를 감당하기에 어렵게 되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원리적 개념과 이 개념을 심어야 할 토양으로의 한국현장을 다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하나님이 백성 중에 거하시는 처소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들의 모임으로 바라볼 때 훈련된 사역자를 통해 아파트나 단독주택에서 변형된 작은 교회로서의 가정교회가 쉽게 개척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노방전도, 문서전도, 전국적 규모의 대형집회 등의 방법이 어려워진 대신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전도가 새롭게 부각되는 이 시점에서 ‘가정교회’에 관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개념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교회법상의 정치적, 행정적 처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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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한국교회는 해방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다. 1945년(382,800명)에서 1955년(1,000,482명), 1965년(2,255,193명), 1979년(5,986,609명), 1990년(11,427,485명)으로 근 10년마다 교인수가 2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90년을 고비로 성장률이 매년 낮아졌다: 1991년(연평균 5.8%), 1992년(4.0%), 1993년(3%). 1995년에 들어서면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2)  한국사회의 상황의 변화: (1) 수직관계에서의 수평관계로의 민주화; (2) TV와 급속한 컴퓨터의 확산(멀티미디어, 사이버미디어)을 통한 정보화; (3) 핵가족화; (4) 전문화; (5) 경제적 여유(GNP 일만 달러와 주 5일 근무제). 2. 한국교회의 상황의 변화: (1) 모이기 힘들다; (2) 전통적인 리더십(Top-down)이 무너지고 있다; (3) 정보화 시대로 치달으면서 인간관계는 단절되어 가정들이 파탄에 이를 것이다; (4) 새로운 형태의 구역 및 조직관리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5) 성도들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6) 교회만이 전문성의 사각지대로 남다.

3)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김영한은 (1) 교회의 내적 요인들로 교회 정체성의 약화, 영성의 쇠퇴, 자기 중심적인 교회, 교회의 세속화, 내실적 성정에 대한 신학적 정립 부재, 기업식 교회운영,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 결여, 은둔 공동체, 교회간의 단절과 생존경쟁, 교회내 신분 계층화, 권징과 권위를 상실한 교회, 세상 문화에 뒤처지는 비전없는 교회, 말씀 궤도를 벗어난 감정적 부흥회, 기도원 운동의 영적 변질, 신학교 난립으로 인한 자질 결핍, 선교단체의 선교열정 냉각 및 도덕성 쇠퇴, 명분없는 교단분열과 반목질시, 개교회의 분열과 불화, 세속주의 물결, 왜곡된 신학을 말하고 있다. 또 (2) 대사회적 요인들로 예언자적 역할 외면, 사회적 신뢰 실추, 도시빈민 선교정책 부재, 사이비 종파로 인한 불신초래를 들고 있다(한국 교회 성장둔화 분석과 대책,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편, 숭실대학 출판부, 1998, pp. 8-35).

4)  좋은 예를 스펄젼(Charles H. Spurgeon)의 사역에서 볼 수 있다. 스펄젼 목사는 19세 때 처음으로 런던에 있는 Park Street Church에 갔다. 그 교회는 1,500명의 좌석을 가진 큰 교회인데 참석한 교인은 고작 200명 이하였다. 9년 뒤 스펄젼 목사가 28세 때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Metropolitan Tabernacle을 지었다. 이 교회에서 38년간 목회를 하는 동안 예배 참석 교인이 6,000명이고 14,000명의 교인이 있었다. 스펄젼 목사가 은퇴한 후 75년이 되던 1972년 관광을 갔던 목사가 그 교회를 방문하였더니 87명이 한 구석에 모여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교회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초라하졌는가? 영국이 변하고 런던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였건만 교회의 사역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서히 떠나기 시작하게 되고 교회가 구원의 능력을 시대에 맞게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이 용어는 1962년 Thomas S. Kuhn 박사가 그의 저서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Univ. of Chicago, Chicago, 1962), pp. 23-51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본래 이 말은 라틴어에서 “모형”을 뜻하였다. 패러다임은 어떤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전적 가정을 말하는데,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진다: (1) 공동체 구성원에 의하여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의 체계; (2)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가치와 규칙의 골격; (3) 문제 해결과 전략을 위한 구조; (4)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렌즈.

6) 이인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이인규 편저, 한국교회와 사회, 139-140.

7)  10여 년 전에 개척한 교회목사들로부터 신도시 주변의 많은 상가교회들은 20-30개 정도 세워지면 이중 2-3개 교회만이 정착하게 된다고 들었다. 이 부분에 통계를 구할 수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8) 교회개혁과 변화는 구호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교회구도의 변화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교인들의 역할은 성패의 20% 미만을 좌우하나 나머지 80%는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은 구도(제도적 장치, System)를 바꿀 수 있지만 교인들은 잘해야 부분만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지도자들의 일선 리더십이 강조되는 이 시기에 지도자들은 회의실에 앉아 전도하려 하지 않는 교인들이나 부교역자들의 변화된 세태의 ‘의식구조’만을 탓하여 ‘의식개혁’만을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9) Everett F. Harrison, 사도교회의 역사와 성장, 신성수 역, 서울: CLC, 1990: 129.

 10) 더욱 탈 예루살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세겜의 언급에 있다. 스데반은 의도적으로 족장들의 묘지로 헤브론 대신 사마리아인들의 성지인 세겜을 언급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탈 예루살렘 사상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11) 건축 후에 솔로몬이 드리는 기도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란 말을 거듭 반복한다. 그는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는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주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를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사…”(29-30절)라고 기도한다.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이며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기도의 처소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인식과 같고 스데반의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이해는 정확한 것이다.

12) 솔로몬의 성전은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다시 건축하여 다리오 왕 6년 아달월 3일에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었다. 후에 헤롯 대왕이 이 성전을 크게 증축하였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착수하여 82년 만인 주후 63년 총독 알미누스 때 완공하였다가 주후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엄청난 규모로 46년째 지어지고 있던 헤롯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라”라고 말씀하였다(요 2:19). 이 말은 성전을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사흘 동안에 일이키리라”고 말씀하시며 성전된 자신의 육체와 그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곧 하나님의 성소는 인간들이 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신의 육체의 성전을 지칭한다. 그렇기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신다(요 4:21-24).

 13) 예를 들면, 할리웃의 제일 장로교회의 리차드 할버슨(Richard Halverson) 목사는 7000명이나 되는 교회의 프로그램을 유지하는데 겨우 365명 정도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 Richard Halverson, How I Changed My Thinking about the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1972), pp. 73-74. 한 몸의 지체된 교인들이 정상적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세워가는데 7,000명 전부가 다 필요하다(참. 고전12장, 엡4장).

14)  교회에 따라 이같은 사역장소와 사역자를 ‘목장/목자’ 혹은 ‘가정/가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고에 삽입된 도표 및 그림자료는 KJFM5-6월호 본문을 통해 보실수 있습니다.

*KJFM 2015년 5-6월호(한반도 분단 70년, 영역별 지도자의 통일을 향한 전망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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