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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FM] PEACE KOREA 국제 심포지엄 드레스덴 선언 1주년 기념 DEBRIEFING

정리 : 명드보라 (통일세대 미래포럼 대표)

지난 3월27일 오전 7시 30분 조찬기도 모임을 시작으로 “통일 그 길을 묻다 Seeking the way to Unification” 국제 심포지엄이 서울 프라자 호텔 그랜드볼륨에서 열렸다. 우리민족교류협회의 주최로 독일의 Unterstutzung Press와 동아일보, 공동 언론후원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NUAC), 국민대통합위원회(PCNC), 교육부, 국방부, PEACE KOREA, 재독한인총연합회의 후원으로 450석 가량을 가득 메운 가운데 성황리에 심포지엄이 시작되었다

정부차원의 참여도 있었지만 많은 참석자와 귀빈들은 기독교계 단체와 인사들이 주를 이루어 배석했다. 그 중 주 강사로 제 1부에서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드레스덴 공대 총장의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바라며’라는 제목의 기조연설 뒤 제2부는 국제심포지엄의 정치분야로 군다 뢰스텔(Gunda Roestel)전 독일 녹색당 대표의 “한국과 독일이 직면하고 있는 통일에 대한 도전과 차이점”이란 주제발제와 경제분야는 고려대학교 남성욱 북한학 교수의 “한반도 U자형 경제벨트와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동북아 경제협력 방안”이란 주제 발제가 이어졌다. 내용은 1. 한반도의 U자형 경제벨트 구상과 필요성 2. 북한의 경제정책과 신의주 3. 황금평, 위하도 특구 여건 분석 4.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동북아 경제협력방안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에버하르트 라이스만(Eberhard Rei B Mann) 제논(Zenon) 유한회사 회장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변화과정에 참여했던 경험”이란 주제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나서 이념에 대한 강요가 완화되며 동시에 동독평화혁명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초기 통일 독일의 발걸음부터 드레스덴이라는 동독의 지리적 위치에서 많은 공업학교들이 설립되었고 혁신적 기술에 대한 수요가 많아 연구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져 오늘날의 안정된 독일에 일조한 기업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오늘날의 제논은 200명의 직원과 전 세계적에 1,200개의 시설을 구축하여 국제적 관심기업으로 성장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의 변화과정에 함께 했던 독일통일과 더불어 제논이라는 기업의 모습을 알려 한반도의 분단 70년에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제3세션의 사회‧문화 영역에서는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의 “동질성 강화를 위한 민간단체의 역할”이라는 발제에서 드레스덴 선언의 의미를 새기고 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협력을 통한 신뢰 구축’ 프레임을 제시했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 의지를 적극적으로 열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진전시킨 진화론적 원칙을 내세웠다. 또한 남‧북 동질성 공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민간단체의 역할을 강화해야 함을 제시했다. 첫째는 순수 인도적 지원 사업의 품목과 규모, 지역을 확대해야 하며 상호 이익을 가져와야 하고 기능주의적 접근의 파급효과를 촉진시켜 다른 분야의 협력까지 끌어내야 함을 강조했다 둘째, 대북 교류협력의 주된 행위자인 민간단체에게 길을 열어주되 도와주는 단체들이 ‘갑’이고 도움을 받는 북한측이 ‘을’이 되지 않도록 당국의 감독‧지휘를 강화하자는 주장이다. 서독의 경우는 동독과의 인도적 협력에 대한 정책과 예산 지원은 연방 정부(내독관계성)가 수립하지만, 집행은 민간단체(독일기독교총연합회 등)에게 맡겼다. 통일시까지 동독교회를 위한 원자재 지원액 총 28억 마르크 전액을 연방정부가 지원했다. 통일 후 대동독지원이 동독 독재정권의 붕괴를 지연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붕괴냐 지원이냐 하는 선택 가능성은 존재한 적이 없고, 단지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지원만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종교영역으로 주도홍 백석대학교 기독학부 교수와 니콜라이교회 기도운동 지도목사인 크리스토프 본네베르거 목사의 “한국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종교발제로 마쳤다.

이중 첫 발제자인 드레스덴 대학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총장의 발제와 마지막 ‘한국의 형제들에게’ 독일통일의 진실을 알리는 글을 심포지엄의 발제 내용과 핸드아웃에서 요약 발췌했음을 알린다. 이는 통일과정을 겪어야 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기에 논문 형식을 벗어나지만 평화통일을 위한 길로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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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의 문화적, 경제적 통합. 대학과 학문의 의미

한스 뮐러 슈타인하겐 총장

이 심포지엄을 통해 저는 다시 한 번 25년 전 이루어진 독일 통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초대받은 저는 1989년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후 독일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에 대한 시대의 증인으로 섰습니다. 비록 지금은 구 동독이었던 독일 동부 지역에서 살고 있지만 저는 서독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그곳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통일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986년에서 1993년까지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에서 부교수로 지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업무 관계로 1989년 독일로 가서 1990년 6월까지 고국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동독에서 일어난 시위가 40년 동안 독일을 분단시켰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불과 1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던 바로 그 시기 1989년 9월 분리된 동베를린의 국경을 자동차로 넘어가면서 삼엄했던 보초들의 검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는 현재와 같은 빠른 매스미디어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침이 되어서야 전날인 11월 9일 21시에 동독 주민들이 자유롭게 서독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뉴스였습니다. 물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는 있었지만 기쁨은 컸습니다. 그 후 정치적 변화 또는 평화 혁명은 계속해서 발전했고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많은 분야가 평화 혁명의 영향을 눈에 띄게 받기 시작했고 사회의 모든 영역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학계의 대표로 참석하였기 때문에 학계의 상황 변화에 대해 논하고자 하며, 지난 5년 동안 잘 알게 된 드레스덴을 예로 들고자 합니다. 드레스덴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말했듯, 독일 통일의 좋은 예입니다. 아름다운 도시와 훌륭한 드레스덴 대학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교육과 학문이라는 두 요소들이 동반성장을 성공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외적 동반성장만이 아닌 인간 내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5년 독일은 4개 국가의 지배를 받았고 소비에트 영역, 미국 영역, 영국 및 프랑스 영역이 있었습니다. 1949년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BRD)과 독일민주공화국(DDR)로 나뉘고 이 두 국가는 매우 다른 형태로 성장했습니다. 동독은 많은 자연과학자 및 기술공학자들이-대부분 강제적으로-소비에트 연방의 학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성장했습니다. 이 막대한 두뇌 유출과 전쟁이 끝나면서 폭격으로 인해 모든 사회 설비가 파괴되었고 드레스덴 대학도 건물의 80%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습니다. 이런 사회 설비와 건물들은 60년대 까지 어느 정도 복구되었으나 동독의 자원 결핍, 학술적 목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선발된 대학 지도자들, 학술 단체의 많은 분리 과정 등은 과거 1920년대 드레스덴 대학의 이름을 빛냈던 약전류기술, 기계건설 등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도 드레스덴 대학은 정체되었고 낙후된 상태였습니다. 반면 서독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대학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며 연구와 교육의 자유를 기본법에 명시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갑작스런 정치적 변화가 왔습니다. 안정감과 기쁨은 두려움과 결합되었고 이런 현상은 구 동독의 5개 주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은 문화적 접근을 저해했고 분단되었던 구 국가의 상호 접근 과정에는 많은 노력이 투입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통일 이후 대학과 전문대들은 동반성장을 위한 강한 동력이었습니다. 청년들은 걱정이 없었고 활기가 넘치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동독에서 정치적 영향을 받거나 이데올로기화 된 과목들은 완전하게 바뀌어야 했습니다. 정신 및 사회학 또는 경제학 등이 그 예로 언급될 수 있겠습니다. 드레스덴 공대는 비록 이름을 공대로 유지하였음에도 이 기간 동안 종합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일자리 유지, 은퇴 요구, 직업 및 대학 졸업 인정 등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도 컸던 시기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독에서의 직업 및 교육 경험이 기본적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이 아니었으면 두 국가는 결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안으로 재시험 또는 인증 절차 등에 대한 후속 조치가 제안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독 주민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던 동독 주민들이 재시험을 보게 됨에 따라 굴욕을 겪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리문제는 자치적 차원의 시도가 이루어져 직원위원회를 구성 직원들의 모든 업무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원회는 끝없이 회의를 소집하여 논의했고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결정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는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연방주의를 통해 국가와 연방주들 사이의 동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새로운 연방주 및 기존의 연방주들이 동일하게 다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독일 연방국 헌법은 16개의 연방주로 이루어지고 연방주들은 교육과 연구분야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국가는 중심 역할을 하여 조세 수입의 일부를 가져가 국가 자체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합니다. 독일의 학술위원회는 연방주 대표들과 정부대표로 이루어져있으며 교육의 연구와 질이 훌륭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학술위원회로서 이들은 동독 대학들 및 전문 대학들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충분하지 않았는데 자금력의 문제가 동독 대학이 겪고 있던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서독이 동독에 행한 물질적 정신적 지원은 엄청났습니다. 인적 지원 또한 막강했습니다. 정부 및 연구기관의 많은 인적 체계는 다시 형성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큰 변화 속에서 동독은 자신의 기존 체계가 급하게 대체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많은 주요 일자리들이 서독의 직원들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서독주민들도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변혁의 시기를 함께 겪어야 했던 동독 주민들과의 소통이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배려했습니다. 25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9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을 통해 동반성장이 성공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20대 중 동독 및 서독 출신을 따지는 이들은 없습니다. 교수들에게도 교육 배경이 동독이었는지 서독이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반적 기준이 세워졌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발전에 필요한 지원이 상황에 맞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의 드레스덴 공대의 경우 드레스덴 컨셉이라고 불리는 학술연맹의 중심입니다. 이는 학술 및 문화에 종사하고 있는 20명의 파트너들로 이루어진 연맹입니다. 독일 학문의 주요 기관인 막스-플랑크협회, 라이프니츠 및 헬름홀츠 협회와 프라운호퍼 협회 또한 연맹에 속해있으며 강한 연구 기반을 갖춘 박물관과 도서관들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90년대의 연구사회설비에 대한 정부의 거시적 정책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기존의 연방주에서 운영되던 많은 비 대학 연구기관들은 드레스덴에 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작센주 정부는 연방정부와 함께 이 과정에 필요한 자본 및 시설을 투자했습니다. 이 방안들은 서독의 발전된 기술 및 학문을 따라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후 분단되었던 양 국가가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생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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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KOREA 국제심포지엄 발제 (종교)한국의 형제들에게

발제자 : 본네베르거 목사

저는 처음에 기계공으로 일을 한 후 신학과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폴란드인, 체코인들, 유고슬라비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독일의 신학자들에 의해 사로 잡혔습니다. 그런 와중에 에르네스트블로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프라하의 봄’ 사건이 발생했고 블로흐에 대한 거대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습니다. 1968년 8월 21일 밤 바르샤바 협정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라하를 강타했을 때 저는 그곳에 있었고 그 시기는 시위와 분노, 폭력과 광기와 슬픔이 가득한 때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공부를 마치고 디트리히 본 회퍼에 대한 졸업 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간디와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에 집중했고 사티아그라하는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생한 힘은 비폭력에 근거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틴 루터킹과 함께 저항했던 미국의 시민인권운동 단체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작센주의 복음 루터교회의 목사가 되어 처음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이후에는 타우하와 드레스덴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편적인 삶을 지양하는 청소년들에 대해 항상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 독재와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런 사이 폴란드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많은 학생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독립자유노동조합연대인 솔리다르노시치의 발족을 목격하면서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동독의 학교에는 군사학이라는 과목이 도입되었고 복음교회는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지요 저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비 경쟁은 심화되었고, 중부 유럽에 대한 압력은 가중되었습니다. 저는 무장 해제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교회들 또한 융통성 있게 행동했습니다. 자원을 확보했고 “평화를 위한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1980년 이후에는 “평화기원기간”이 “칼 대신 쟁기를”이라는 표어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제 생각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저는 이를 “사회적 평화복무”라고 칭했습니다. 그 목적은 동독에 새로운 병역 대체복무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드레스덴에 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동독 전체로 확산됩니다. 복음교회의 종교회의 또한 이 문제를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교회의 종교회의도 “사회적 평화복무”에 대하여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편지가 확산되었습니다. 전자메일로 전해지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정당과 국가는 이를 거부했지요. 저희에 대한 비밀경찰의 감시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체계를 형성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를 ‘평화기도’라고 부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같은 날 시내의 한 교회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매주 다른 평화단체들이 기도를 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분열은 항상 존재합니다 제 권한을 벗어나는 날들이 많아지고 교회간부들은 스스로 압력을 받기 시작했지요. 저는 계속해서 교회의 평화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평화기원기간 동안 많은 행사들을 주최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대규모 단식 기간을 가졌고 많은 예술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첫 단식은 83년 라이프치히에서 였습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실크스크린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라이프치히로 가서 노동자 인권단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니콜라이교회에서의 평화기도 집회를 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평화복무”와 “칼에서 쟁기로”의 신념은 늘 제 곁에 존재했고 많은 이들이 함께 했습니다. 동독에서 이주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었습니다 많은 신청자들은 니콜라이교회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는 많은 분열을 발생시켰습니다. 분열은 교회 밖에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989년 여름, 이주에 대한 갈망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주허가를 위해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체포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폭력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며 저항에는 어떤 도구가 활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준비된 이들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폭력에 대한 평화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비폭력 시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베를린,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는 다시 한 번 폭력 시위와 진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10월 9일이 라이프치히에 찾아왔습니다. 결전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준비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사회적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 비폭력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전단지를 인쇄했습니다. 이틀에 걸쳐 인쇄된 전단지들은 약 25,000장이었습니다. 점심부터 배포되기 시작하고 세계 언론들이 우리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바로 우리의 행동을 볼 수 있길 바랐습니다. 70,000명의 인파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폭력은 없었습니다.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3주 후 저는 뇌졸중을 앓게 됩니다. 저는 병원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접했고 독일의 통일과정은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을 파는 것은 큰 이윤을 남깁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독일이 모두 무기를 팔아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좋은 무기를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칼에서 쟁기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 방향성을 유지할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진실과 비폭력 그리고 사랑이 존재하는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KJFM 2015년 5-6월호(한반도 분단 70년, 영역별 지도자의 통일을 향한 전망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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