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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FM] 지역교회 목사가 바라보는 전방개척선교와 선교적 교회

정명호

선교와 교회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흔히들 무엇이 순서적으로 앞서는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우리에게는 답이 너무나 분명하다. 닭이 먼저다! 하나님이 각기 모양대로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주제들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먼저인가? 교회가 먼저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지만 교회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한 권의 책으로서의 성경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짧은 소견으로 대답하자면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들이 존재했고, 말씀들에 의해 형성된 교회 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성령의 감동 가운데 성경이라는 책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역사적 교회의 산물이다. 성경과 교회는 그렇게 긴밀하고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관계와 같이 복합적이다. “교회의 본질이 선교인가? 아니면 선교의 목적이 교회인가?”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맞서 있다. 첫째는 ‘교회가 선교다(The Church is mission)’라고 정의하면서 교회를 선교적 관점에서 보고 교회와 선교를 하나로 보는 입장이다. 둘째는 교회가 선교를 사명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The Church has missions)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것 혹은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이다. 선교가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교회가 존재하기에 선교가 실행되고 있다. 짧지 않은 논증의 단계를 거쳐야 하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결과물인 동시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우선적인(어쩌면 유일한) 선교의 도구이다. 아마도 이 주제가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논의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목회자 입장에서 본 선교적 교회론의 등장 요인

선교와 교회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학문적 논의는 벌써 오래된 신학적 주제이다. 그러나 최근 발간되고 있는 선교적 교회론을 다룬 도서들을 통해서 볼 때 이 주제는 본질적 학문적 논의를 계승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지역교회(특별히 서구교회)가 처한 현실적 문제 앞에서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적 교회론의 논의는 ‘어떻게 선교사역자들로 하여금 선교사역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지역교회가 참여할 수 있을까?’ 하면서 선교의 문제를 고민하던 지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다. 또한 파송된 선교사역자들이 지역교회를 염려하며 지역교회가 본질적인 선교의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외침에서 부각된 것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주제가 선교사역자가 아니라 목회자들에 의해, 선교에 관한 고민이 아니라 지역교회에 관한 고민에서부터 제기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선교적 교회론은 매우 복합적인 주제이다. 선교관련 사역자들이 선교론의 입장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이야기하면 주된 논의 주제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교회가 얼마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느냐?’에 관한 비판을 거쳐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당연히 선교를 최우선의 사역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교회론의 입장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논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어떻게 총체적인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의 주제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동일하게 하나님나라를 꿈꾸지만 ‘복음의 실현 영역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이루어가야 한다’는 사회복음 주의자들과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영혼구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복음전도와 영혼구원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선교의 두 개의 큰 흐름과도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적인 관점으로 쉽게 결론지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신학적 입장도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계획을 완전히 반영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 앞에서 우리는 서로가 하나님의 계획의 일면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지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자기부인과 상호인정이 필요하다.

전방개척선교와 선교적 교회

오늘날 전방개척선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타나는 오해들은 선교를 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으로 보지 않고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 또는 선교단체의 사역으로만 보려는 (부지중의)관점(view point)의 오류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예를 들어, 랄프 윈터에 의해 제5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에서 “What are Mission Frontiers?” 라는 제목의 발표가 있은 후 많은 선교사역자들이 전방개척선교를 이해하는 데 심각한 혼란을 느꼈다. 미전도종족을 선교의 주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존의 흐름이 힘을 얻어가는 가운데 선교사 재배치 문제까지 설왕설래 하게 만든 시점에서 갑자기 학교 교육에서의 교재(12 주제 중 9번)라든지, 창조세계로서의 자연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12 주제 중 11번), 그리고 악의 세력의 도전(12 주제 중 12번) 등의 내용은 도대체 선교현장에서 왜 그것이 전방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에 충분했다. 선교전문가의 발표에 대하여 차마 전면적인 반대를 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어떤 사역자들은 이 내용들을 ‘영역의 전방’, ‘사역의 전방’, ‘선교를 위한 전방’ 등의 다양한 표현을 써 가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핵심 논의 주제(미전도종족 선교)로부터 비켜 세워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만 있었다면 충분히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는 문제였다.

선교를 가르치고 동원할 때는 ‘하나님의 선교의 주체적인 도구로서의 교회’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선교현실에 들어서는 순간 ‘교회는 선교의 후원자, 선교단체나 선교사는 선교의 주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 선교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직접적인 전방 이외의 모든 전방은 전방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전방개척선교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위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단체나 선교사가 아니라 지역교회가 선교의 주체적인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선교단체나 선교사는 지역교회의 일원으로서 Mission을 위한 missions를 행하는 사역자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지역교회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적 차이라는 전방을 넘어서기 위해 선택/위임된 일꾼에게 언어의 훈련과 문화적응의 훈련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함에 물질적 제한이라는 전방을 넘어서기 위해 지역교회는 모금하는 일에도 열심을 낸다. 소위 말해 오늘날 우리가 선교라고 표현하는 이러한 일련의 사역들을 이 글에서는 ‘doing으로서의 선교’라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그렇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동시에 교회가 위치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선교들(missions)을 수행한다. 통전적 구원을 위해 구제와 사회봉사, 심지어 사회정의 복음의 실천을 위해 행하는 일련의 모든 노력들도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걸림이 되는 전방들을 개척하는 교회의 선교적 사역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being으로서의 선교’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노력들이 전방개척적이고, 신학적 오류와 내부적 변질 및 부패를 넘어서고자 했던 종교개혁 역시 올바른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한 전방개척사역이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교회가 직면하는 모든 어려움과 풀어야 할 숙제들과 난관들이 모두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전방이다.

이러한 이해에 근거한다면 전방개척선교는 현행의 doing으로서의 선교사역자들의 전유물일 수 없다. 심지어 한국 교회가 해외 선교에 참여하는 비율이 현저히 낮다 하더라도 통상적 개념으로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교회를 두고 선교적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니까! 이미 그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이니까!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교회들조차도 전도와 성장(교회라는 공동체 또는 조직의 차원에서는 성장이고, 영혼구원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님나라 구원백성의 증가이며,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일련의 모든 노력이 전방개척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전개하면 우리 스스로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주장은 doing으로서의 직접적인 선교사역을 하지 않는 교회에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닌가?” “선교를 하지 말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교회를 선교사역으로 동원하기 위해 교회의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 되며, 선교사역이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 뿐 이다.

이제는 선교단체들과 선교사역자들이 지역교회를 물질이나 선교후보생을 동원하는 후원그룹 정도로 인식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한 지역교회에 대하여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어떤 선교단체는 지역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기관으로서의 교회보다는 개인후원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러한 ‘개인 후원자들 역시 교회’라는 성경적 관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물론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을 했으면 최선의 영적, 정서적, 물질적, 사역적 후원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교회가 선교사의 사역 한 가지만 바라보고 후원 대기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역교회는 자신들의 현장에서 또 다른 전방을 개척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교사/선교단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사 또는 선교단체 그리고 목회자는 Mission을 위해 missions 가운데 한 부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선교사역자들이 목회자들을 타문화/해외 선교사역에 동참하도록 격려하고 동기부여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목회자들은 선교사역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선교적 성격을 공유하고 파송하는 ‘modality’로서의 교회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제까지 선교사역자들이 지역교회를 선교를 위해 일깨우고자 노력했었다면 이제는 선교사역자들이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답답하리만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사역의 사명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의 부담으로만 안고 있는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각성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목회 현실적 문제에 대한 전문성일 가능성이 높다. 교회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교적 교회임을 다시금 각성하고 목회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목양 사역의 현장에서 교회의 선교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나라 실현이라는 거시적인 선교적 마인드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타문화와 종족 선교사역에 동참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지역교회와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개인 삶에서의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교회가 위치한 자리에서 지역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총체적 복음전도 사역을 위한 목양활동에 직접적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증거 되어야 할 복음을 위한 선교사역에 교회역량이 투자되고 집중되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할 존재적 사명이 있다.

한국 선교계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협력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CAS(Comity, Adoption, Specialization) 시스템을 제시한 지가 오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의 효율성과 극대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포럼, 네트워크, 연합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사역자들이 사역/지역/전문화에 따른 협력만이 아니라 지역교회와 선교단체, 목회자와 선교사, 선교사와 성도들 사이에도 자신들의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 개척해야할 전방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협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지역교회와 선교단체, 선교사와 목회자가 마주하는 테이블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단순히 선교사역을 위해 얼마나 후원/협력할 것인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본질적인 교회의 선교적 교회됨을 실천하기 위한 동역자적 협의 또는 전략 나눔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상의 논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정체성 회복 및 교회성장 운동의 흐름 속에서 대두되었다.

▶ 선교적 교회는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한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다.

▶ 선교적 교회는 기존의 지역교회들이 행해오던 목회철학과 프로그램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선교적 교회를 규정짓는 기준을 객관화 하기는 힘들다.

▶ 선교적 교회는 doing으로서의 선교사역을 행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를 교회사역의 한 표현이나 영역으로 생각하는 교회를 ‘선교지향적인 교회’라고 표현한다면, 선교를 ‘교회됨의 핵심이자 본질’로  생각하는 교회를 선교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

▶ 선교적 교회는 지상교회의 본질적 특징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선교적 교회로서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지역교회의 본질적 방향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지역교회는 성도  또는 목회자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선교적 교회로 세워졌다.  다만 그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교회는 그 선교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

▶ 선교적 교회는 전방 개척적이다. 모든 지역교회는 복음사역의 전방을 개척하기 위해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지금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지역적 전방을 위해 개 교회별로는 전도를, 선교지에는 선교사를 통하여 전방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심지어 열린 지역에서의 선교사역에서도 더 많은 열매를 더욱 지속적으로 얻으려면 사역의 전방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모든 사역은 전방 개척적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론을 내릴 경우 전방개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는 퇴색된다. 더욱 더 분명한 우선순위로서의 전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역교회는 불신자 전도가 우선순위이어야 하고, 선교사역에서는 미전도 종족이 우선순위 이어야 한다.

▶ 교회는 다시 한 번 지역 안에서의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기관(organization)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운동(movement)으로 자신들의 특징을 규정하고 하나님나라 확장과 실현을 위한 역동성(dynamics)을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조직(system)이나 구조(construction)의 안정이나 유지보다는 복음의 실천과 파급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 한국 선교계는 선교에 있어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렸던 지역교회를 회복시키고 돌아오게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선교적 교회의 성경적 모델과 결론 

과연 인류 역사상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이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인류역사 기간 내내 이상적 교회를 꿈꾸며 현실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비관적인 듯 하지만 심판의 기준이 결과가 아니라 방향성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낙관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우리가 완벽하게 그 말씀을 지킨 결과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은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시는 삶을 통하여 가장 온전히 드러났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과제를 교회에게 주셨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펼쳐나가신다.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 통치의 중심이자 세계 역사의 중심이며 성령의 선교를 수행하는 주체이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일하심과, 아들 예수님의 순종하시는 삶과, 중보자 성령님의 존재는 교회의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이자 교회의 본질적 성격이 선교적임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이런 이해를 통해 선교는 교회의 기능 중의 하나에서 교회의 핵심적 본질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 교회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할 선교적 교회는 역사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본질적으로 교회의 교회됨을 다 설명해낼 수 있는 모델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특징들을 보여주는 여러 교회가 등장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각자 그 독특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선교적 교회의 단면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초반부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날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모델이다. 거기에는 기도와 모임, 전도, 가르침과 선포, 교제와 기적이 넘쳐나고, 물질의 소유욕을 초월하여 유무상통하는 모습마저 보여주기도 했지만 내부지향적인 성격에만 머물러 외부세계를 향한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 확장이라는 사명에는 미진하였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야’할 교회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렀던 것은 순종 가운데 불순종이었다. 오늘날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영성과 전도와 기타 사역들에 열심을 내면서 전방을 개척하고는 있지만 타문화 선교에 동참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아마도 being으로서의 선교적 교회만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복음전파와 선교에 비자발적인 초대교회가 선교지향적 교회로 전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핍박이었다(행 8:1). 박해는 오히려 복음전파의 촉매가 되어 유대인을 넘어 헬라인에게로, 예루살렘을 넘어 시리아의 안디옥에까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가졌던 이상적인 교회상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복음전파와 선교에 있어서는 남다른 헌신을 보여주었다. 타 언어권과 지역과 민족을 향해 복음전도에 열심을 내면서 최고 리더들까지도 선교사역을 위해 파송하는 안디옥 교회는 doing으로서의 선교적 교회의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Milfred Minatrea는 그의 저서 「Shaped by God’s Heart」(미국의 감자탕 교회들, 김성웅 역, 생명의 말씀사, 2007, p.277)에서 “기성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도록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한 집단의 행동을 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어려운 변화는 없다. 행동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변화가 일어날 때는 인식의 변화가 가장 빠르고 쉽게 일어난다고 한다. 태도의 변화는 좀 더 어렵고 시간이 더 든다. 행동의 변화는 새로운 지식과 태도의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남으로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가장 어렵다. 난이도와 시간이라는 요소로 볼 때 가장 어려운 도전은 집단의 행동변화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로 하여금 선교적 성격을 회복하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기성교회들이 선교적 교회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해서 교회들을 현재대로 내어버려두면 되는가? 물론 아니다! 어쩌면 원래 선교적 교회로 세워진 지역교회들 안에 잠자고 있는 선교적 성격들을 일깨워 내부적(being)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게 하고, 외부적(doing)으로는 세계선교에 전폭적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선교사역자들이 돌파해야할 최고의 전방개척이 아닐까?

…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

   (스가랴 4:6b-7a)

(2011년 1- 2월호 게재)

* 전방개척선교저널(KJFM) 2015년 3-4월호 vol.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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