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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성경적 패러다임

앤써니 테일러(Anthony Taylor)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면 무엇을 하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위로부터 새로 거듭난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보기보다 그렇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한 독일 친구가 이야기 하기를 독일에서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될 때에, 만일 그가 이전에 란데스키르체(보통 영어로 국교회(state church)라고 잘못 일컫는다)에 속한 구조의 일원이라고 하면 그는 그곳을 떠나서 믿음의 교회(believing church)(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침례교인이 되거나 오순절 계통의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친구는 교회론적으로 정교 분리주의자(Separatist)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에 의하면 란데스키르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누구도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신자들은 란데스키르체를 떠나서 개신교회에 합류해야만 한다. 란데스키르체에 속하지 않은 다른 독일 친구들도 동일한 입장을 가진다. 그와는 대조되는 란데스키르체에 속한 또 다른 독일 친구가 나에게 있다. 그는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고 란데스키르체 내에서 그리스도를 활동적으로 따르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룩, 소금 그리고 빛과 같이 기능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들 내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최근 그리스도께 돌아온 그 독일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가? 란데키르체를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그 안에 남아 있어야 할까? 그 대답은 답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리주의자가 좋은지 내부자로 남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확정적인 답변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일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에 대한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둘 다 그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떤 신자들은 란데키르체 내부에 남아 있기도 하였고(디트리히 본훼퍼의 경우가 두드러진 한 예일 것임) 어떤 자들은 그곳을 떠나서 자유교회(free churches)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양자의 경우 모두 양심 및 각 개개인이 그리스도에게 돌아가게 된 상황에 의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독일 친구는 이러한 모호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그 자신이 분리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분리주의적 관점은 만일 사람들이 란데스키르체에 남아 있게 된다면 성장할 수 없음을 가정하고 있다.

내 친구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가정을 가진 분리주의적인 생각이 널리 퍼져있어서 복음주의 교회론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선교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분리주의적 교회론 패러다임은 교회가 선교를 하고자 할 때에 “종교 대결”(conflict of religions)”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형성에 기여해왔다. 즉, 집단들(크리스천이건 비크리스천이건)이 공유하는 것들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중립적인 것으로 사용하여 다른 집단들 사이에 교량을 만들기 보다는, 항상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다른 집단들 가운데에 있는 것들은 잘못된 것이거나 유해한 것으로 일단 차치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 대결”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이다. 이 때문에 “종교 대결”을 접근방법으로 사용하는 집단들은 다른 집단들과 대조를 이루는(종종 다른 입장에 서있는) 자신들의 다른 점들(즉, 자신들의 고유한 신학형성, 교회정책, 예배 양식 등)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상이한 부분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자 하는 데에 필요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 대결” 패러다임과 대비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the Kingdom paradigm)이다.1) 이 패러다임은 한 개인의 그리스도 및 믿는 공동체와의 관계가 질적으로 어떠한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어서 그러한 공동체들은 다른 실천 및 강조점들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은 성경과 양립하기만 하면 그것이 새로운 것이건 전통적이건, 외래적이건 혹은 토착적이건 문제가 안 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특별한 교단이나 종교적 전통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어떤 한 사람이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 된 것을(골 1:13) 보여주게 되는 근본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한 개인에게 들어가게 되면 그가 그 사람을 당신의 나라로 옮기신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어떤 신앙인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것은 그 사람의 핵심적인 정체성이 변화한 것(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자가 된 것)과2)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헌신한 데에서 확증된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은 그의 세계관(신앙관)과 삶이 변화하여 성장해 가는 것으로서 확증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통치하심을 반영하는 삶을 지속하게 된다.3)

이러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성경적이며 선교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어째서 성경적인가에 대하여 랄프 윈터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단지 하나의 드라마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원수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즉 그의 나라가 들어가는 것이다.”(2009, 210). 그것이 선교적이라는 관점에 관련하여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간단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죄악으로 어그러진 당신의 창조세계를 구하여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교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2010, 411).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으로 방향을 다시 맞추게 되면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힌두교, 불교, 유대교 및 이슬람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 가운데 있는 개개인 및 공동체들과 관련 될 때에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장벽들을 잘 조정해갈 수 있게 도와준다.

이 글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이 성경적으고 선교적인지 보여주고 세계 종교들 가운데에 있는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처음 한 쌍이 받은 위임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표하는 자들로 기능하도록 권세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스리기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한 국가로 형성시키셨다. 그것은 바로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반영하는 국가이다.(신명기 4:5-8)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시내산으로 이끄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 되셨고(사 44:6)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었다.(출 6:7; 신명기 7:6)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들이 되도록 지명되었을 때에, 그들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시 89:27; 대상 17:13-14; 29:11) 아비야(Abijah)는 다윗 계보의 왕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위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여로보암에게 한 그의 말을 보면 그가 이러한 이해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비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대하 13:8)

게다가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적 목적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써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계속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장래에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공의로 그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의 의로운 아들을 왕좌에 앉히실 것을 계시하셨다(렘 33:14-16; 사 9:6-7 및 11:1-10). 다니엘 또한 이러한 메시아 왕국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듞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러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개념적인 상황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마태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듯이, 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마 4:17) 당신의 가르침을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것은 그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셨기 때문이었다.5)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한다.(마 4:23) 예수님의 수 없이 많은 고침의 역사는 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취임식을 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었다.(크럼프(Crump) 2006, 43)

비록 예수께서 그의 나라를 시작하는 일을 하셨지만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차이점은 그의 나라가 전개되어 가는 단계 가운데에서 보여진다.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취임시키는 모든 사역을 마치셨을 때에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말하였다.(마 28:18) 이 말씀에 대한 의미심장함을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께서 만유의 주”시라고 하는 말 가운데에서 선언하였다.(행 10:36) 예수님의 위임과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가시적이지 안다. 이러한 불가시적인 예수님의 통치 과정 동안에 그의 나라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가는 위임을 교회가 수행해감으로써 계속 확장되어 간다.(마 28:19)6) 이 시대의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물리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다시 오게 되시면, 그는 모든 종족들을 심판하시고 그의 계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멸하시고, 악을 제거하고 온 지구 상에 당신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확장시키실 것이다. 요한은 맨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라고 계시한다.(계 21:1) 이렇게 새로운 세대에는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 그리고 온 족속으로부터 구속받은 자들이 함께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5)

이로한 단계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적 차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현재적 차원 또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바울은 그의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현재적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존은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에 옮겨진 것이라고 하는 선언에서도 확증된다.(골 1:1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현재적 차원은 비록 왕께서 불가시적으로 다스리지만 그의 나라는 가시적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로마서 14:17 내용을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바울은 로마 신자들이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도록 돕기 위하여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사려깊게 배려하는 것이 그들 안에서 예수의 실제와 계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요 13:35절 또한 참조하라.)

이러한 성경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구축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및 서로간에 대한 관계를 강화시켜 나가도록 하는 관계 중심의 질적인 인격 개발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적인 성장은 믿는 자가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반영한다. 로잔 운동의 케이프타운 선언에서(2011) 이러한 인격의 질을 갖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은 믿는 자와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새겨져야 하는 삶의 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지나 시편의 기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혜자들 및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러한 성경적 생활양식은 공의, 긍휼, 겸손, 순전, 진정성, 성적인 순결, 관용, 친절, 자기부정, 환대, 평화추구, 앙갚음 하지 않음, 선을 행함, 용서, 희락, 자족과 사랑 등이 모두 가미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한양하며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배우게 된다. (Part 1.6.D)

이러한 질적인 면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을 특징지어야 한다. 그것들을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세워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질적인 영역들이 성장하도록 해준다.(롬 8:3-14; 갈 5:22-25 및 겔 36:24-27을 참조하라) 이것이 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의 전체적인 특징이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성령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 그의 나라 공동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반영하는 삶의 질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해주시는 분이다.

경건한 인격이 진공상태에서 개발되지 안는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에서 서로 함께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공동체 가운데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는 패러다임이다.(고전 12:13; 고후 13:14). 따라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의 통합적인 국면은 하나님 나라의 살아 있는 표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가시적인 공동체들의 확장인 것이다.

끝으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많은 종족들 가운데에 지으신 놀라운 다양성을 가치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주권하에 이러한 다양성을 두시기 원하신다고 하는 패러다임이다. 이사야 2:1-4은 열방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특질들을 가지고 주님의 발 앞에 나아 올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사 56:6-7 및 계 5:7; 7:9 을 참조하라) 계시록 21장은 도래할 세상에서도 다양한 종족들이 존속할 것이며 어린 양의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을 암시하고 있다.(21:24) 라민 사네(Lamin Sanneh)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있는 이러한 다양함을 성경적 신앙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복음에 들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 안에 문화적 다양함이 주는 유익함이라고 말하였다. (2009, 7)7) 따라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성경적이며 선교적이다. 그것은 기도나 예배의 방법들, 복장이나 음식, 종교적 전통, 교단주의, 사회적 정체성과 같이 “종교 대결”이라는 패러다임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그러한 특정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에서는 그러한 것들 보다는 변혁을 이루어 내는 그리스도의 실제하심, 영적인 정체성 및 그리스도의 영이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경건한 관계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제와 특징을 확증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골 3:1-17을 보라).

종교대결적 접근에서는 다른 정교적 전통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전통들을 버리고 다른 문화 가운데 있는 종교적 전통들을 수용하라고 설득되어진다. 따라서, 누군가 미주리의 스프링필드에서 있는 오순절 예배에 참여를 하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 있는 오순절 예배에 참석을 해보면 의례가 갖추어진 예배의 양식에 엄청난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말씀이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비록 다른 전통들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에 잘못된 것은 전혀 없지만, 그것은 자체적으로 한계성을 가진다. 페샤와르의 예배에 참석해보면 그 예배 공동체가 얼마나 단일종족적인지 관찰할 수 있다. 그 지역에 있는 가장 커다란 두 종족(파쉬튠과 힌두코) 출신의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경적 신앙이 그렇게 표현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거기서는 문화적, 종족적, 기관적 그리고 정체성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끌거나 의미심장할 무엇을 제공하지 못하는 외부적인 짐만 부과해 놓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에서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종교적 전통을 따라야만 한다거나 특별한 종족집단에 자신들을 합류시켜야 한다고 요구하지 안는다. 따라서 회심(conversion)을 했다고 해서 자신의 사회종교적인 공동체를 거부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안는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역사하심으로 내부로부터 변혁을 이루어 가시도록 하는 것이다.(막 1:17; 5:19)

이러한 패러다임은 예수께서 일하셨던 방법을 반영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눅 17:11-19; 요 4:5-42), 레바논과 데가볼리에서 이방인들에게(막 5:1-20; 7:24-8:10) 그리고 갈릴리에서 로마인들에게(마 8:5-13)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을 때에, 자신과 제자들이 준수하였던 유대 종교적인 관습들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그들 가운데에 보여주셨다.8) 예수께서는 다른 예배 양식에 비하여 어떤 특정한 예배의 양식을 특별한 하나의 방법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오직 진정한 한 하나님을 전심을 다하여 사랑하고 그의 영과 진리안에서 그를 예배할 것을 주장하셨다.(요 4:23-24)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볼 때에 기도와 예배는 다른 집단들과 기관들에 의하여 그 양식과 제도에 있어서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수행되어 왔다. 이는 종교적인 전통들이나 제도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적 목표가 아니라 도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은 다음과 같이 결론 짒는다: “따라서, 비록 종교를 누구에게라도 부과하지 않고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화에 따라서 변화하기는 하지만 시기 적절한 성경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구에게라도 계속적으로 권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사역을 상황화하는 선교적교회한 어떠한 의미인가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2010, 312)

스텐리 죤스(E. Stanley Jones)는 기관적 기독교를 의미하면서 교회가 다른 형태들을 취하는 문제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와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러한 나라는 문화, 국가, 인종 및 종교에 제한을 받지 안는다. 그 나라는 어느 곳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열려져 있다. 예수는 세상의 종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종교에 반하는 입장의 새로운 하나의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왜냐면 종교란 신을 찾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족이든, 종교 혹은 문화이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폐하려 함이 아니라 이루기 위함이다.”라고 하셨다. 문화나 종교 가운데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선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 가운데에서 성취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4,26)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배타적인 단체가 아니다. 어디에서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교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1972, 292-293)

죤스는 다양한 사회-종교 집단들 가운데 속하여 예수를 신실하게 따라는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였다. 오늘날도 유대인, 불교도, 힌두교도 및 무슬림과 같은 비기독교 사회-종교 집단들 내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듭난 사람들이 수 십만이 있고 그들 가운데에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예수께서 실제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어떤 이들에게는 무척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의 퍼스펙티브는 종교간 대결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종교 공동체들이 가지는 독특함들 때문에 충분히 축복받는 위치에 있어 왔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회-종교 집단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동체를 떠나서 자신들이 누려왔던 독특한 것들을 받아들이라고 권장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성경의 핵심은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어떤 특별한 종교적 전통에 들러 붙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 그리스도 안에 계속 있어야 하고, (2)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순종해야 하고, (3) 자신이 그리스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구성원임을 시위하는 질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4) 그리스도 나라의 활동적인 구성원들을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새롭게 예수를 따르게 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교단이나 전통에 대한 충성도 보다도 그것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사람들이건 그들과 상호관련하는 크리스천들이건 믿는 자들의 삶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신들의 신앙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사회-종교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교단에 합류하고 그 전통을 따르도록 인도하신다면, 그들은 그러한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을 위한 신실한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사회-종교적인 공동체 내에 남겨 두시면, 마찬가지로 거기에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자들은 그들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잘 따르도록 지지해주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함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시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는 현재의 모습과 달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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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ference)

각주

1) 릭 브라운의 하나님 나라 참조.

2) 이러한 핵심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다른 이슈들과 함께 데이빗 그린리(David Greenlee)가 편집하여 곧 출판하게 될 “Longing for Community”라는 책(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를 참조하기 바띾다.

3)맥스 터너(Max Turner)는 특별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관점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누가가 보는 구원에 관한 다양한 면 가운데에서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하고 역동적인 임재(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도록 강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과(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에 대한 확증), 그들이 기쁨으로 증인이 되고 예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2004, 107)

4) 라이트(C. Wright)는 우리에게 성경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읽을 것을 권한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온 창조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계약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2006, 51). 그러한 관점에서 티머씨 테넌트(Timothy Tebbent)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따라서 선교교회에 주어진 명령에 대한 순종적인 반응으로 단순하게 선교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실 이 부분이 결코 관과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을 구속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2010, 61)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에 대한 해석학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5) “복음서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이 판명되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처럼 지상에서 왕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6) 비록 예수께서 현재 통치하고 계시고(엡 1:20-21) 우리 또한 그 분과 함께 통치에 참여하고 있지만(엡 2:6), 우리는 약함과 고난 가운데에서 다스리고 있다. (엡 4:1, 6:10-20; 또한 빌 3:10을 보라.)

7) 라네(Lanneh)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기독교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번역할 필요를 식별하게 되었고 그 역사적 발전 가운데에서 이중적인 힘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그 하나가 그 유대적 뿌리들의 의미심장한 국면들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면서 그것들을 상대화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부분은 새로운 종교의 자연스러운 팽창으로이방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방인 문화에 대한 오명을 벗기는 일이었다.(2009, 1)

8)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요한이 다음과 같이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6-17)

 

*본고의 그림 및 도표는 ‘전방개척선교’ 본문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전방개척선교 2015년 1-2월호(vol.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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