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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Allah)는 누구인가: 야훼(Yahweh) 혹은 이방신(Pagan Deity)? 성경적으로 살펴보는 답변

로렌스 워터맨 & 조나단 에드윈 컬버

세계화 가운데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크리스천들과 무슬림들이 다양하게 조성된 환경들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게 될 기회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만남을 통해 복음전도의 열매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경적인 진리에 기초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과 심지어 경험 많은 선교사들 까지도 이슬람의 알라에 대한 정체성에 불분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알라를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확증해야 할지 아니면 완전하게 다른 신으로 여겨야 할지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진리이신 하나님과 그 진리되신 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하나의 모델로 그려봄으로써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자 한다.

도식적 개관(The Schematic Perspective)

그림에서 큰 원(A)는 진리되신 하나님의 모든 것 혹은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하자. 그러면 그와 상대적으로 보다 작은 원(B)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성경 가운데에 드러내신 만큼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에는 원 B가 무한히 큰 원인 A라는 항목 가운데 들어 있는 작고 유한한 양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두 원을 즉시 마음에 둘 것이다.

이는 (마치 욥이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논의 과정의 올바른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 어떤 사람들도 붙잡거나 이해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분이시라는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해이다. 만일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먼저 감탄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토의를 할 때에 마치도 그 분에 대하여 다 알고 그 분을 묘사할 수 있다고 하는 오만함을 그 분 앞에서 드러내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 수 있을까? 우리 각자가 혹은 각자가 속한 교단이나 신학자 집단들은 어디에다 얼마 정도의  그 다음으로 작은 서클을 그려야 할까?

먼저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에 대하여 아직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도 그 분을 더욱 완전히 알 수 있도록 그 분의 위대함에 대하여 더욱 항상 추구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의 서클 C는 B의 부분 집합으로 그려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겸비함에 대하여 충분히 인지한다면, 완전한 진리에 비추어 볼 때에 우리 신앙 체계 가운데에는 그 진리와 정확히 일치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포함할 수 있음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입장을 수 천의 신학적인 관점들에 비추어 볼 때에, 얼마나 많은 정직하고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모든 신학적 견지에 대하여 우리들과 일치하지 않는지 고려해본다면, 이러한 관점들 가운데 하나나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하여 어떤 누구는 옳고 또 다른 누구는 틀릴 수 있을 가능성을 내포함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서클인 C는 사실상 어느 정도 하나님의 진리 밖에 있는 영역, 즉 사상, 사고, 혹은 태도 등에 있어서 그릇된 부분들을 포함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표시될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쉽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직면하게 해준다. 종교적 상이점들에 대한 토의를 진행할 때면 A와 B 그리고  C가 서로 일치 않는 서클들인 것을 너무나 자주 반영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다시 하면,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완전하게 서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마치도 그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말하려고 한다.

이제 더욱 겸손하고 보다 성경적인 그리고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와 다른 믿음의 체계에 대하여 토의할 준비를 해보자. 이제 어떤 양식으로 표현되는 전통적(부족적)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먼저 바라보기로 하자. 자연 계시로부터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문화적 신화 가운데에 파 묻혀있는 특별 계시의 흔적들로부터 창조주에 대한 어떤 진리의 국면을 그들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는 오해와 그릇된 정보들, 인간적 생각의 찌끼들과 마귀의 속임수로 이루어진 수 많은  층으로 겹겹이 비참하게 싸여있다. 이러한 상태를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고 맹인된 상태라고 성경은 말하고(롬 2:19), 그들을 묘사할 수 있는 서클 D는 대부분이 서클 A 밖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집단의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1) 우상숭배에 있다. 그것은 창조주가 아닌 다른 피조물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넓게 적용해보면,2) 그것은 돈이나 음식 혹은 소유에 대한 태도를 포함할 수 있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우상숭배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은 확실하며, 여기에는 복음주의 크리스천, 무슬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추어 보다 정확하게 우상숭배에 대하여 조직신학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신약 텍스트의 로마서 1:18절 이하의 구절들을 가지고 작업을 해 나가기로 하자. 즉, 우리의 논의를 우상숭배에 대한 어휘적인 정의로 보다  좁혀서 생각하면 그것은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을 섬긴다거나,3) “신상 및 그 형상들”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집단들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의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였을까? 그들은 구약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당히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육신에 대하여,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의 인격 되심에 대하여,  메시아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인 의미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거나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생에 대하여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기 보다는 외적인 규율준수에 더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보았다. 비록 다가올 구속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을 어떤 개개인들은 실천하였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나타내는 서클 E 는 서클 B 혹은 C 보다 더욱 작아져야 할 것이고 복음의 주요 요소들이 거기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서들 가운데 있는 드라마와 같은 내용의 주된 줄거리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다루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클 E는 더욱 커져갔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더욱 완고하게 하여 서클 E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하는 마음을 가졌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 밖에 분명하게 남겨두었다.

이제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을 도표에 그려볼 차례이다.  그것은 서클 F로 나타나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 이해는 기독교 및 처음 세기의 유대교와 일치하고 있다. 단지 유일하신 주재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유지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통치자시요 그는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 분께서는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궁극적인 도덕 기준을 제공하시는 모든 것에 뛰어나신 분이시다.4)

그러나 동시에 수 많은 요지들 가운데에서 불일치를 발견한다. 무슬림들은 크리스천들과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이라든가 인간의 죄성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것과 같은 이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어서 도덕적 무결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셔야 될 필요를 갖지 못한다.

서클 A 바깥 쪽에 있는 것으로서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 많은 무슬림들이 하나님께서는 알려질 수 없다고 믿는다. 그 분은 단지 자신의 뜻만을 계시하시지 자신을 드러내시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이 지금 일어나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의와 죄가 동시에. 축복과 고통이 동시에 있으며 어떤 자들을 지옥에 가는 것으로 어떤 자들은 천국에

가는 것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알라는 선 뿐만 아니라 악도 만들어낸 분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이므로 용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즉, 그 피조물에 대한 어떠한 것도 관계됨이 없이) 행하신다. 그 분은 그래서(당신의 공의나 사랑 등) 어느 것에도 일관성 있는 기준을 갖지 않고 마음대로 하시는데 모든 것이 그 분의 절대적인 주권적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표의 분석

도표에서 크리스천, 유대인, 이교도 및 무슬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나타내 보였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우상숭배적인 부족신앙에 가까운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부족적인 “신관”은 우상숭배로 특징지어진다. 피조물들에 신격을 부여하여 예배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올바른 자리를 침범한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실천적 수준에서 보면, 이와 같은 우상숭배가 민속 이슬람 가운데에서 종종 일어나는 것이라는 논지를 펼 수 있을 것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부적, 액막이나 기타 물건들이 하나님께서 가지신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보호와 안녕 그리고 인도와 같은 기능들을 위한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봐라!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소리치기 이전에 우리를 도전하며 생각하게 만드는 황금률이 있다. 먼저, 소위 정통 이슬람은 이와 같은 실천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많은 무슬림들도 그와 같은 행위는 우상숭배적이며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것이나 허용하시는 것들 가운데 속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한다.

만일 우리가 정통 이슬람에서 거부하는 것에 기초하여 이슬람을 판단한다면, 우리 또한 크리스천들로서 우리 스스로에게 답변을 먼저 구해야 할 수 많은 이탈 행위들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속적 기독교”가 존재하며 우상숭배적인 기독교적-이교주의 또한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실천되는 것을 세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을 이야기 하고자 할 때에는 이와 같은 우상숭배적인 실천들을 제외하기 원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도 그와 동일한 예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무슬림들에게서 우상숭배를 분명하게 본다면 그들도 많은 “크리스천들”에게서 우상숭배적인 실천들을 본다.

그렇다면 가장 정통이라고 하는 이슬람 조차도 카바(Kaba’)를 향하여 절을 한다든가 검은 돌에 입맞춤을 하는 행위들은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행위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우상숭배적 배경을 가진 요소들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5) 우리는 이러한 실천들이 성경의 “썩어질 사람이나 짐승 등을 따라 만든 형상”과 같이 확실하게 드러난 우상숭배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공평하자면 우리는 이슬람은 시초에 이와 같은 형태의 우상숭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두어 가지의 임시적 평가를 내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첫째로, 무슬림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 이전의 유대인들의 관점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부족 신앙에 가까운가? 그것은 기독교 이전의 유대적 관점에 훨씬 가깝다.

둘째로, 예수께서 나셨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관점과 무슬림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관점 사이에는 연속성이 더 많은가 아니면 불연속성이 더 많은가? 우리는 아마도 결정적인 차이점을 찾아 낼 수 없을 정도로 불일치 보다 유사점을 훨씬 많이 찾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어 가지의 다른 유리한 입장에서 본 알라의 정체성에 대하여 고려하는 동안 이러한 면들에 대하여 일단은 단순하게 그대로 두고 생각하자. 먼저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것이 그 어원학적인 면이다.

어원학적인 측면

“알라(Allah)”라는 이름을 어원학적인 면에서 조사함에 있어서 우리는 언어학적인 원리를 또한 상기할 것이다. 즉, 용어 자체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된 어원학이 아닌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의미를 결정한다는 언어학적 원리이다. 영어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많은 좋은 예시들이 있다. 우리가 들은 바 “hussy(말괄량이)”는 “housewife(가정주부)”라는 말에서 왔지만, 그 두 단어는 완전히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버트 모레이(Robert Morey)는 알라의 기원을 토의함에 있어서 이러한 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인 “이슬람이 쳐들어 온다”(The Islamic Invasion)에서6) 모레이는 알라는 아랍 이교도들의 달 신인 신(Sin)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열변한다. 그의 논점을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알라(Allah)”가 “알일라(al-ilah) 혹은 그냥 “신(the god)”이라는 뜻으로 신격을 나타내는 전이슬람 용어의 축약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모레이가 남아라비아의 판데온(많은 신을 모신 신전)의 주된 신격인 달 신 “Sin(신)”이 알일라(al-ilah)라고 지칭된 고대의 비문을 읽었을 때에, 그는 알라(Allah)가 이 이교적 달 신에 그 근원이 있다고 비약적으로 결론 지어버렸다(p. 215). 만일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실제로 틀림),7) 이슬람이 고대의 달 신을 섬기는, 즉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부활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더욱 심한 비약이다.

“알라”가 무함마드 이전의 이교적 아랍인들에 의하여 사용된 호칭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슬람 이전의 알라에 대한 모든 이해가 거짓이며 그래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속한 내용을 뜻할 수 없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아랍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알라”라는 단어를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호칭을 무함마드 이전 그리고 이슬람이 있기 이전에 사용하고 있었다!8) 우리는 여기서 모레이가 간과한 한가지 부가적인 사실을 또한 알 필요가 있다. 꾸란은 이교도 아랍인들이 “알라”를 믿는다고 공언한 것으로 묘사한다. 그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그는 하늘과 땅 그리고 태양과 달의  창조주라고 하였다(Q. 29:61).9) 또한 그들이 때때로 위급한 사건을 만났을 때에 그 분께 기도하였다고 하였다(Q. 29:65).10)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들 이교적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작할 수 있는 우상들과 신격들을 선호하여 그 분을 거절하였다(Q. 6:136, 10:18, 29:65-66). 그들은 마치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저주하는 이방인 이교도들과 같았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롬 1:21) 지금은 이들 이교적 아랍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알라(Allah: God)를 계속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로서 창조주 알라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성경적 진리 편에 서있게 된 것이다.

다시 로버트 모레이에게 되돌아 가보면, 모레이는 성경 자체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델로 제시된 바를 저주하고 있다. 그의 논지는 이교주의에서 사용된 하나님에 대한 칭호는 적합화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며 부가적인 성경 내용을 채워 넣는다. 만일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약의 기자들은 무덤으로나 가져 가야 할 엄청난 실수를 “데오스(theos)” 라는 단어를 적합화하면서 저지른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제노파네스(Xenophanes),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같이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는 이교도적인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단어이기 때문이다.11) 그럼에도 데오스는 하나님의 최고 계시의 많은 부분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용어를 “하나님(God)”이라고 자유롭게 번역하여 사용한다.

우리는 아브람이 멜기세덱과 만났을 때에 비록 그의 메시지가 가나안 이교도들 가운데에서 사용되어졌던 신의 이름으로 전달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진리와 대면하면서 그를 하나님을 뜻을 대표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봄을 알 수 있다.12) 아브람은 엘 엘리온(El Elyon)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십일조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는 나아가 그의 손을 들어 올리고 엘 엘리온 신의 이름으로 자진하여 맹세까지 하였다.

성경적인 원리에 의하면, “하늘과 땅의 주재”되시는 절대적 신에 대하여 어떤 한 부족이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고 하면, 그 이름이 그들에게 복음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함을 알 수 있다.13)

 모레이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또 있다. 이교적인 칭호들의 적합화에 대한 부적격성을 이야기 할 때에 그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God”이라고 하는 단어의 사용을 스스로 저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단어의 언어학적인 기원은 “알라” 만큼이나 더욱 원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독일어의 “gott”에서 유래한다. 그 단어는 어떤 “예배의 대상”을 묘사할 때에 기독교 이전의 유럽인들이 사용한 용어이다.14) 우리는 그 용어가 한 높은 신격을 지칭한다는 데에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교적 유럽의 예배 행위가 아랍인들의 예배 만큼이나 성경적이 아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레이의 “Allah”는 안되고 “God”은 된다고 하는 논지는 이교적 신격을 나타내는 아랍어 단어 보다 유럽의  단어가 더 낫다고 하는 숨겨진 가정을 불행하게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의도치 않은 자민족중심주의는 모레이가 서구 기독교에 익숙하였던 반면 중동 기독교에는 익숙하지 못하였던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선교학적인 측면

데오스 및 엘 엘리온과 같은 단어에서 이미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교도들 가운데에서 사용된 신학적인 단어들이 그 집단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 이교적 신격을 무턱대고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돈 리챠드슨(Don Richardson)이 상세하게 보여준 바와 같이,15) 이러한 이름들은 그 부족이나 국가 및 온 열방 가운데 이미 심겨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흔적들이 될 수 있다. 로마서 1 장에서 바울이 이방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이 바라보는 피조 세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다고 진술한 것은 리챠드슨의 논지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1:20).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자기들만의 고유한 관점과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결정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단어를 꼭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  비성경적이고 자민족중심주의적인 태도를 마음에서 제거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이름들과 문화 그리고 믿음의 체계들을 이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어떤 한 주어진 문화 가운데에서 사용되는 창조주에 대한 기존의 이름이 사용될만할 정도로 진리에 접근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제켜 두어야 할만큼 이교적인 속성들(a la Zeus)로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알라”는 어떠한가? 만일 우리가 유럽에서 “God”을 가나안에서 “El Elyon”을 그리고 그리스에서 “theos”를 한국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16) 이미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아랍이나 아랍의 영향을 받는 문화권에서 참 하나님에 대한 수용할만한 이름으로 “Allah”를 거절하는 것이 우리의 무지이거나 편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어건(Ergun)과 메흐멧 카너(Mehmet Caner)는 각각 이러한 논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알려진 저서인 “Unveiling Islam”17) 에서 카너 형제는 이슬람의 알라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사이에는 완전한 불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카너 형제에 의하면, 그 둘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커서 아랍의 기독교인들이 (아마도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들도 여기 포함될 것임) 예배에서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에 “알라”를 사용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고 진정 잘못되었다는 것이다.(pp. 106-107)

카너 형제 주장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는 한 가지 요지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pp. 106, 108) 따라서 카너 형제에 의하면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을 정확하게 성경적 하나님의 개념으로서 기꺼이 관련시킨 것은 그 “알지 못하는 신”이 그들 자신들의 그릇된 신들과는 속성이나 이름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카너 형제가 언급한 것을 한 가지 중요한 부분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어떤 신격을 지칭하는 이름들은 너무나 뒤틀리거나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오염되어 진리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그러한 이름들은 야훼 하나님과는 너무나 확연하게 달라서 우리가 그 이름들을 복음 증거에 공통 접촉점으로 사용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러한 면을 일단 염두에 두고, 카너 형제가 자신들의 주장에서 다음의 논지로 넘어간 것을 살펴보면, 우리는 “알라”라는 이름을 결코 사용할 수 없는데 무슬림들에게 그 이름은 철저하게 단일신적이지 삼위일체적이지 않고 “알라”에게서 아무런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성경적인 하나님과 너무나 그 속성이나 특징들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카너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유롭게 사용하였던 그리스 이교도들의 “데오스” 개념은 무슬림들의 알라 개념 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더 성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가?”라고. 카너 형제는 이 점에 대하여 정말 그렇다고 하기는 진정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마찬 가지의 질문을 자신들이 마음 편히 사용하고 있는 “God”이라는 단어에 적용하여 던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God”(독어로는 gott)는 진리가 심각하게 결핍된 이교도적 신격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너 형제는 무슬림들의 알라 개념이 이교적 독일인들의 “gott”개념보다 신학적으로 열등한 것이라고 기꺼이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아직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을 내리지 못하였다. “성경의 야훼와 이슬람의 알라가 동일한 신인가?”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을 고려해 보기로 하자.

개인적 신앙고백적 측면

상황화의 근본적인 원리는 어떤 문화 내부에서 성경적인 적용을 할 때에 그 한계는 그 문화 내부에 있는 내부자들이 궁극적으로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이 수 많은 문화적 양상으로 퍼져 있지만, 이러한 원리는 동일하게 이 논의 가운데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우리들이 이슬람의 알라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분석을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감히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 때 무슬림으로 개인적 시간을 보내었던 그리고 알라를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 보았던 이제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경적으로 뿌리를 내린 그러한 크리스천들의 관점을 따라야 할 것이다.

먼저 필 파샬이 연구한 업적을 인용해보자.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 수 많은 무슬림 배경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이들은 “메시어적” 무슬림들이 아니다. 카너가 저술한 서적 107 페이지를 보라.) “당신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에, 당신은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당신이 무슬림이었을 때에 예배하던 신과는 다른 신에게 예배를 시작한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이 질문은 한 예외도 없이 모두 강하게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보여주었다.”18)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과 가진 바 있던 우리 자신의 경험 또한 그와 비슷한 반응을 증명하고 필 파샬이 내린 결론과 동일하다. “이슬람은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그러나 완전히 오도된 것은 아닌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나타낸다. 이슬람의 신이 성경의 하나님과 완전하게 거리가 있다고 천명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은 오직 그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분명한 성경적인 가르침이다.”19)

우리의 답변

그렇다면 성경의 야훼는 이슬람의 알라와 동일한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답변은 “Yes, but…”이다. 그 차이점을 간과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유사점들을 무시하는 것도 심각한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하나이신 주재시요 권능자이신 하나님, 모든 만물의 창조자시요 그것들을 지탱하시는 분,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심판자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통치하시는 분, 전지전능 하시고, 자비와 용서가 많으시고 진리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최종적인 선으로서 모든 도덕 위에 뛰어나신 분을 확증하고자 한다. 이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

하나님에 대한 두 관점에서 그 주된 차이점은 관계적인 차원에서 그 거리감이다. 즉 그것은 무슬림들의 관점에서 알 수 없을 정도의 멀리 계시는 그 분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차이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슬림의 하나님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야기 할 때에 그 인식적인 면에서 다른 결과를 낳을 정도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지만 동일한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치명적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이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분이 될 정도로 그토록 멀리 밀쳐내었다. 그 가르침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그토록 현저하게 감쇄시키고 모호하게 해서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관계적 차원의 연결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와 “알라”의 본질적인 동일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고유함을 타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알라”가 “야훼”와 동일한 존재를 나타내지만, 이슬람은 그를 우리가 관계할 수 없는 너무나 멀리 계신 분이어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인간 구세주가 되실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카너 형제들은 “무슬림의 신은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과 삼위일체를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이 맞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카너 형제처럼 무슬림들도 꾸란에서 묘사하는 바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아들 됨과 삼위일체를 거부한다.21) 우리가 세 신을 예배하는가? 즉 성부 하나님과 성모 그리고 그 아들 예수를 예배하는가? 꾸란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올바르게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다.(Q. 5:116) 우리가 성부께서 마리아와의 육체적 관계를 통하여 예수를 낳았다고 믿는가? (Q. 6:101)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도 무슬림들과 동일하게 이러한 것에 대하여 신성모독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공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무슬림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그들이 단지 복음에 대한 서투른 풍자를 들었을 뿐이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성경적 교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복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풍자들처럼 들리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교도였던 우리 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처음 세기의 유대인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슬람식 가르침 가운데에 투여된 “복음에 대한 접종”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인 양 방어적일 필요는 없다.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우리 스스로가 거부하는 그러한 복음의 추악한 풍자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과 실제 그 분이 누구이신가의 그 차이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적용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이슬람의 알라는 누구인가?”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슬림들과 관계하게 되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위한 신학적인 모퉁이 돌과 같다.

이 주제를 생각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아슬람을 향한 기본적인 태도적 입장을 가진다. 이슬람은 그로부터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삶을 방어해야 할 위협적인 세력인가? 혹은 그것은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는 잊혀진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인가?

아마도 그 두 가지가 모두 동시적으로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크리스천 들은 그 중 어느 한쪽에 강하게 치우친 입장에 기댄다.

무슬림들에 대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서 바라보는 이들은 교량을 세우기 원한다. 이슬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담을 세우려고 한다. 사실상, 그들은 마귀들의 총 공세로부터 쉽게 점령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종종 이미 세워져 있는 교량 마저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 시키려 한다.

여기 그와 같은 작가의 결론이 있다. “좋은 무슬림은 자신이 참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전 삶으로 그를 공경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슬람의 알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주문으로 인류의 1/6이나 되는 영혼들을 잘못 인도하는 마귀의 영이다.”22)

이 말을 들을 무슬림을 상상해보라.(심지어 이를 믿는 크리스천들과 만나서 이와 같은 태도를 접한다고 생각해보라)!23) 알라가 사막의 마귀라고 하는 태도는 단순히 비성경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무슬림들을 전도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해물이다. “당신의 신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요. 그는 마귀라니깐?”이라고 말하는 어떤 크리스천을 따라서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서로가 말로 공격하거나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 이외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십자군 행진을 다시 하려고 하는 크리스천 “영웅”들에게  있기 때문에 무슬림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게 한다.

이 글을 위하여 조사된 문헌들 가운데에 알라를 이교적 신격의 호칭으로서 표현한 자료들은 두려움과 위협이라는 언어로 예외 없이 테두리 쳐 있다.24) 신학이 그러한 태도를 만들어 내는 기전력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들 간에 연관성이 일관성 있게 관찰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무슬림들과 나누고자 하는 자료들은 알라의 정체성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거나25) 이슬람의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 사이에 있는 유사점에 대하여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급하고 있다.26)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함축된 의미들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두려움이나 방어적 자세에 기초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들에 기초하여 무슬림들에 대응하는 것을 도전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훨씬 더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관계를 낳도록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태도가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하나님 사이에  중요한 연속성을 확증하는 것이 무슬림들에 대한 어떤 개인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알라”를 이교도의 신이라고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는 무슬림들에게 결코 사랑이 담긴 열매 맺는 복음전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가능하기만 하면 무슬림들과 최대한으로 의사소통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서로의 공통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입장을 인정하고 복음 메시지의 필수적인 다른 국면들을 향하여 옮겨갈 수 있도록 공감하는 요지들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바울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는 바와 같은 접근방법이다.27)

넷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공통점을 구하고 확증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슬림 구도자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무엇으로 이런 사람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없다면,28) 우리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매우 구체적인 부분에서 이야기 하자면, 용어들의 사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가 무슬림과 크리스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잊지 말고 무시하지 않는 반면, 적절한 시간과 방법으로 무슬림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 있는 차이점들을 상호간에 분명하게 해줄 수 있는 용어들을 민감성 있게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의사소통을 제안하는 바이다.

무슬림들과 의사소통함에 있어서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보이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알라”를 사용하면 그렇게 따르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영어로 의사 소통한다면 마찬가지로 “God”을 사용할 것이다

때때로 “God”을 사용함에 있어서  어떨 때에는 그 “God”을 “크리스천들이 그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God”을 의미하는 것으로 “Allah”를 “무슬림들이 그를 이해하는 God”을 의미하는 것으로 편리하게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그 두 용어가 이해의 교량으로서 커다란 공통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그들이 전적으로 분리된 호칭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며 비생산적인 의사소통이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전세계적으로 이슬람 세계와 서방 세계(무슬림들의 시각에서 크리스천 세계로 불리는 세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29) 알라에 대한 진리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사랑스럽게 적용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높이며 그 긴장을 줄일 수 있는 작은 한 방법이 될 것이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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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엡 5:5과 골 3:5.

2) 보다 정확히는 “이들은 종교 집단들”이다. 우리가 부족집단들 가운데에서 다양한 신앙과 실천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이 글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3) 롬 1:23.

4) 무슬림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과 무소부재성의 속성이 포함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정통 무슬림의 관점은 이러한 속성이 배제되지만 어떤 무슬림 저자들은 알라가 이러한 속성 또한 지닌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사실, “내재하시는 분”은 99 가지의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하나이다. “거룩한 분”이라는 이름 또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거룩함에 대한 뜻은 크리스천들이 거룩하다는 단어의 사용에 내포된 의미와 같지는 않다. 꾸란은 단지 형용사 “거룩한”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관련하여 세 번 사용한다.(Q. 2:30, 59:23, 62:1). 존 엘더(John Elder)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 주해가들은 이 구절에서 등장하는 “거룩한”에 대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 유명한 꾸란 주석가인 알바이다위(Al-Baidawi)는 그를 “그로 하여금 그가 되지 않도록 하는 그 어떠한 것도 완벽하게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엘더는 그를 “순전성 혹은 완전성을 나타내지 도덕적인 결함이 하나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John Elder, The Biblical Approach to the Muslim  Worldwide Evang. Crusade, Fort Washington, 1978, p. 54.

5) 많은 현대의 비무슬림 학자들은 메카의 제단과 그 의식들은 고대 아랍 이교주의의 산물이라고 믿으며 거기에서 무함마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종교”의 살아 남겨진 자들이라고 식별함으로써 무슬림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 다른 학자들은 유대인의 영향이 이러한 관습의 기원 가운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참고: F. E. Peters, Mecca: A Literary History of the Muslim Holy La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p. 19.

6) p. 218 in Robert Morey, The Islamic Invasion: Confronting the World’s Fastest Growing Religion.  Eugene, OR: Harvest House,1992; a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of his book formerly titled Islam Unveiled.

7) 모레이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시험해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어떤 누구도 알라가 달 신과 관련된다고 하는 어떠한 고대 비문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한 역사적 증거의 결여는 모레이가 하는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재앙이다. 꾸란 자체가 이렇게 말한다: “태양과 달을 경배하지 말고 그들을 만드신 알라를 경배하라…” (Q. 41:37). 두 번째로 알라(Allah)가 알일라(al-ilah)의 축약된 단어라는 것은 단지 한 이론일 뿐이다. 많은 학자들이 알라는 아람-시리아계 언어인 알라(alah)/알라하(alaha)라는 어휘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참조: F.V. Winnett, “Allah Before Islam”, The Moslem World 28(3), pp. 246-248; J. Spencer Trimingham, Christianity Among the Arabs in Pre-Islamic Times, London: Longman, 1979, p. 251, n. 14). 비록 모레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용하는 논리는 아랍어에 있어서 알일라(al-ilah)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인 호 데오스(ho theos)의 사용에 대한 이해를 매우 난처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 에서 하나님은 “ho theos : the (only true) God”라고 불리지만 고린도 후서 4:4 에서 사탄을 지칭하는 이 세상의 신(ho theos)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만일 사탄이 “ho theos”이면 성경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ho theos”가 고대에 사탄을 숭배하는 이교도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셋째로, 비록 모레이가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신을 모신 신전의 우두머리 격으로 달 신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가 남부 아라비아의 달 신들인 Sin, Wadd 그리고 다른 이름들이 이슬람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중부와 북서부 아라비아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증거를 매우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세프 헤닝거(Joseph Henninger)는 고대 아랍종교에 대한 탁월한 학자인데 중앙 아라비아의 별 모양의 신격들의 영향력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논지를 편다.(참조: “Pre-Islamic Bedouin Reiligion” in Studies on Islam ed. By Merlin L. Swartz, New York: Oxford, 1981, p. 11).  우리는 중앙과 북서부 아라비아는 남부 아라비아와 비교할 때에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히샴 이븐 알칼비(Hisham Ibn Al-Kalbi)(820 AD)가 후발(Hubal), 알랏(Allat) 그리고 마낫(Manat)과 같은 다른 신들의 묘사를 장황하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서부 아라비아의 달 신인 와드(Wadd)를 섬기는 것에 관하여 지나칠 만큼 간략한 지적을 한 점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 된다.(참조: The Book of Idols: Being a Translation from the Arabic of the Kitab al-Asnam by Hisham Ibn Al-Kalbi,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 p. 9).  모레이가 완전히 무시해버린 알칼비(Al-Kalbi)의 “The Book of Idols”은  고대 북서부 아라비아의 이교적 우상숭배에 대한 필수적인 표준 자료이다. 따라서 알칼비가 와드(Wadd)나 신(Sin)이 아니라 후발(Hubal)이 메카 이교도들의 최고 우상이었다고 말할 때에(p. 23) 그 자체가 이미 모레이가 달신이 메카의 최고 신이라고 잘못 말한 것과 정면으로 위배된다(p. 215)! 간단히 말하면, 모레이의 작품은 아라비아의 달 신과 알라에 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오류 투성이이고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 “스펜서 트리밍햄(Spencer Trimingham)은 그의 책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 기독교(Christianity Among the Arabs in Pre-Islamic Times) (London: Longman, 1979, p. 74, n. 67)에서 에베소 공의회(431)로 보내어진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압둘라(Abdullah: 알라의 종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아랍 비숍이 있었는데, 그는 네게브(Negeb)에 위치한 엘루사(Elusa)의 아랍 크리스천들의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트리밍햄은 또한 “압달라 이븐 타미르(Abdallah ibn Thamir: 517-520)가 남부 아라비아의 나즈란(Najran) 지역의 아랍 크리스천들의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p. 298).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필립 히티(Philip K. Hitti)가 “알라(Allah)”가 6세기 경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랍 크리스천의 묘비 가운데에서 사용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History of the Arabs, New York: MacMillan, 1951, p. 101).  또한 릭 브라운(Rick Brown)이 이슬람 이전에 크리스천들이 사용한 알라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한 예도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Brown, “Who is Allah”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vol. 23:2(2006), p. 80). 알라라는 이름은 이슬람 이전 시대에 이미 크리스천 진영에서 사용하였음을 확실한 증거를 통해 알 수 있으며 그 이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주님”에 대한 이름으로 이해되었다.

9) 모레이는 꾸란 29:61과 다른 구정들을 잘못 인용하였다. “만일 네가 그들(메카의 이교도들)에게  누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고 해와 달을 만들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알라”라고 말한다.” (참조: Q. 6:136, 10:18, 23:84-89, 29:63,39:3). 이러한 아랍 이교도들의 알라에 대한 신앙을 우연치 않게 보여주는 꾸란의 가치 있는 참조구절들은  고대 메카인들이 알라를 달 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달의 신 즉 달을 만드신 신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0) 꾸란 29:64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면 그들은 알라에게 유일하게 예배 드려야 할 대상으로 기도하지만, 자신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한 이후에는 다른 신들을 그와 관련 짓는다.”

11)브리타니아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 15th ed., vol 13, p. 951 and vol. 14, p. 538; cited by Don Richardson in Eternity in Their Hearts.  Ventura, CA: Regal Books, 1981, p. 19.

12) 창 14:17-24.

13) 이 주제는 “Eternity in their Hearts, pp. 27-32”에 잘 전개되어 있다.

14) 옥스포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Compact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71, p. 1168

15) Richardson,  Eternity in Their Hearts.

16) Richardson, ibid., p. 68.

17) 어건 메흐멧 카너(Ergun Mehmet Caner)와 에밀 페디 카너(Emir Fethi Caner)의 책: Unveiling Islam: An Insider’s Look at Muslim Life and Beliefs, 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2002.  이 책을 펴낸이는 카너 형제를”내부자”로 그리기 위하여 선택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 십대였을 때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13 혹은 14 세였을  때에 얼마나 실제적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이슬람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이 “외부자”적인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18) Phil Parshall, The Cross and the Crescent.  Wheaton, IL: Tyndale House, 1989, p. 23.

19)  ibid, p. 24.

20)  Rom 3:29,30a.

21) 꾸란은 기독교 이단을 거부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있다. 왜냐하면 4세기부터 아라비아에는 마리아를 신격화여 숭배하던 컬리리디안(Collyridians)과 같은 아랍계 이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 Geoffrey Parrinder, Jesus in the Qur’an, New York: Oxford, 1977, p.135.

22) Abd-Al-Masih, Who is Allah in Islam?  Villach, Austria: Light of Life,  p. 78.

23) 로리 굿스타인(Laurie Goodstein)이 뉴욕 타임즈에 발표한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글을 참조하라. 그 제목과 실린 시점은 다음과 같다: “Seeing Islam as ‘Evil’ Faith, Evangelicals Seek Converts”, New York Times, May 27, 2003. 굿스타인은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이 이슬람을 “매우 마귀적이고 사악한 종교”리고 묘사하였다고 하고 남침례교단의 총책임자였던 제리 바인스(Jerry Vines)가 무함마드를 이슬람의 선지자로서 “마귀가 씌워진 소아성애증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어떤 복음주의 진영의 비아냥거리는 “쓰레기 같은 토크”의 결과로 국가복음주의협회로 하여금 그들 동료 신자들에게 반이슬람 수사학적 어조를 낮추라는 요청을 이슈화하는 동기를 유발시켰다.

24) “Who is Allah in Islam?”, op. cit., 서두 부분(Islam – The World Power of the Future?)의 두 페이지에(p. 5,6) 이러한 언급이 있다: “…이슬람에 침략당할 위험(danger of being overrun by Islam)”,   “이슬람에 의한 세 번째로 커다란 공격(The third great attack by Islam)..”  모레이의 입장은 그의 저서 제목을 선택한 언어 자체(이슬람의 침공: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에 직면하면서 (The Islamic Invasion: Confronting the World’s Fastest Growing Religion)) 가운데에도 드러나 있듯이 놀라우리만큼 감정적인 격조를 품고 있다. 그 책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의 어조이다.

25)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Josh McDowell & John Gilchrist, The Islam Debate.  San Bernardino, CA: Here’s Life Publishers, Inc., 1983; Anne Cooper, complier, Ishmael My Brother.  Kent, England: STL Books, 1985;  Gerhard  Nehls, The Great Commission, YOU and the Muslims.  Claremont, South Africa: Life Challenge; L. Bevan Jones, Christianity Explained to Muslims.  Calcutta, India: Baptist Mission Press, 1964.

26) 여기 다시 그 대표적인 예를 제시한다: Kenneth Cragg, The Call of the Minaret, 2nd edition.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 p. 30;  James Dretke, A Christian Approach to Muslims.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79, pp. 203-206;  Badru D. Kateregga and David W. Shenk, A Muslim and a Christian in Dialogue;  Vivienne Stacey, Practical Lessons for Evangelism       Among Muslims.  London, UK: Interserve, 1988.  p. 17;  Nasser Lotfi, Iranian Christian.  Waco, TX: Word Books, 1980 p. 97-99

27) 각각 행 13:16-41 그리고 행 17:22-32.

28) 고후. 2:14-16.

29)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Touchstone (Simon & Schuster Inc.), 1996;  Akbar S. Ahmed, Postmodernism and Islam, New York: Routledge, 1992; among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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