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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없는 교회”1)를 통해 짐 피터슨2)이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전방개척 선교”에 관하여

신바울3)

1. 들어가는 말

세계 4대 종교는 2010년도 기준으로 기독교 31.5%, 회교 23.2%, 힌두교 15.0%, 불교 7.1%로 분류되었다.4) 주후 1세기 이후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는 기간에 아시아 대륙과 중동에서도 힌두교와 불교, 유교, 도교, 회교 등도 지역 종교로서 발흥하여 꾸준히 성장하였고 적극적인 포교를 통해 현대에 와서는 세계적 종교로 자리매김을 했다.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현재 기독교를 포함하여 세계 4대 종교로 분류될 수 있는 회교, 힌두교, 불교 등은 지난 십 수세기를 걸쳐 확산되면서 주변의 부족 종교들을 흡수, 통합하는 방법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 주요 종교는 공통적으로 태생적으로 선교 지향적인데, 심지어는 공격적인 선교정책도 채용해 온 그들 종교가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치 문화적으로 서로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빈번한 상호 충돌 위험성을 통제하기 어려운 열린 상황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들 세계 종교의 선교전략이 배타적이며 전투적인 동시에, 그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에 흡수 통합될 정도로 교세가 약한 종교는 없기 때문에 종교간 충돌은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긴장 상황을 진작부터 간파한 신학자 한스 퀑은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가 있을 수 없다.”5)고 경고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금장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견해를 피력했다.

다른 종교를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는 독선적 태도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의 진리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성숙한 종교의식이라 할 수 없다… 남을 억누르고 자기만이 승자로 군림하겠다는 패권주의의 상극 논리는 지난 시대의 낡은 사고다. 이제는 함께 어울려 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성장하는 공동체 의식의 상생논리가 요구된다.6)

더구나 원불교 대사전은 종교다원주의와 배타주의 우월주의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신앙과 수행의 특성을 그대로 인정하며,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통해 이해하려한다. 한편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것이라 보고, 다른 종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월주의는 다른 종교의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가장 뛰어난 진리성과 구원성은 오직 자신의 종교에 있다고 본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적 성격의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와 구원은 오직 자신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다른 종교는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종교 간의 협력은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7)

이런 논리대로라면 이웃의 종교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은 종교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한 ‘윤리적 명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염원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다원주의 사회의 세계시민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지구 윤리적 관심’이라 할 수 있다.8)

이 같은 포용적인 태도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기류와 함께 타고 들어오는 저변에 깔린 사회적 사조인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서철원은 로마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종교다원주의를 신학적으로 확립한 카알 라아너의 주장을 살피면서 그가 “기독교는 절대자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고 일반보편종교는 절대자에게 이르는 보편적인 길이라고 선언하였으며 그의 신학에 창조주와 같은 절대자는 없지만 이렇게 모든 종교를 다 절대자에게 인도하는 보편적인 길이라고 가르친다”고 비평하였다.9)

짐 피터슨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에 상당한 우려를 표면하면서 그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실제적 진리는 과학적 처리로 발견될 수 있고 또 이성적인 사람이 든든히 설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존재한다고 믿는 계몽주의를 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와 가치를 별개로 떼어 낸 후 개인적인 선택으로 가치를 매기도록 길을 터 준 것이 계몽주의(Enlightenment)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절대 진리를 강제로 끌어내림으로써 진리 파괴 작업을 무르익게 하였다. 이제 많은 경우에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완전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10)

“메시아 예수만을 통한 구원”11)이라는 하나님 나라 복음 메시지는 천성적으로 배타적이라 비난 받기가 쉬운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사렛 예수만이 메시아”라고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사역을 수행해 나갈 수 있을지 저자는 실제적 지침을 주고 있다.

2. 그리스도를 증거함12)

다른 진리들도 마찬가지로 좋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을 무지한 것이나, 오만한 것이나, 독선적인 것으로 결론짓지는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증거를 하느냐 하는 그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될 것이다.

이 세대의 시류에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압력이 우리를 누른다. 연극에서 마귀의 입장을 옹호하는 역할을 하면서 레슬리 뉴비(Leslie Newbigin)은 이렇게 묻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종교로부터 인류가 얻은 모든 경험을 기꺼이 다 들어보려는, 진리를 찾는 자가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설교하려고 하려는 시도를 그만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서 대화식으로 하는 것이, 또한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당신의 것으로 대체하려하기 보다는 당신의 종교적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경험도 더 풍성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아니겠는가?”13)

다원주위 사상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기권해 버리는 것은 성경이 주는 핵심적 메시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해 주셨다-에는 타당하지 않다. 진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증거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증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다.

메시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내가…진리요.” 얼마나 이상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수년 동안 씨름했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명제이며 개념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나는 의아해 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리를 가르친다’ 혹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준다’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는 “내가 진리요” 라고 하셨다. 나사렛 예수 그 분 자체가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메시지이다. 우리의 메시지는 다른 것과 견주어지거나 비교가 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사고(思考) 체계나 명제가 아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 사도인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14)

힌두교도(Hindu)는 궁극적인 다원주의자이다. 힌두신앙 안에는 유일신 개념, 다신 개념, 불가지론, 무신론 모두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힌두교의 기원은 수천 년 전 아마 창세기에 나오는 가나안의 종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둘은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힌두는 어떤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느낀다. 인간의 고통은 환생의 인과응보적 순환 사이클로 설명된다.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네가 받는 응보는 전생에서 뿌린 것에 합당한 것을 받는 것뿐이라 말한다. 그 시스템에는 육천 만의 신들과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위한 자리가 주어져 있다. 힌두사상이 그어놓은 선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조주의(dogmatism)이다. 힌두사상은 절대적인 것만은 거부한다.

E. 스텐리 존스(Stanley Jones)는 인도에서 힌두교도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그의 일생을 거의 다 보냈다. 그의 자서전, 오르막길의 노래(A song of Ascent)에서 그가 겪으면서 발견한 것들을 기록하였다. 어느 날 저녁 존스는 한 인도 재판관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알고자 했던 주제의 핵심을 찌르는 내용이었다.  존스는 이렇게 썼다, “내가 물었다, 누가 힌두교도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누구든 착한 사람은 힌두인데-바로 당신도 힌두입니다.’ 내가 또 물었다, ‘어디까지 힌두이고 어디부터는 힌두가 아닙니까?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어떤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힌두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예, 무신론부터 다신론까지 다 말입니까?’. ‘그러나 힌두의 경계는 무엇이며 힌두가 아닌 것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어떤 것이든 믿어도 여전히 힌두입니다, 단지 나머지 다른 것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존스는 주목했다. “여기 힌두교의 천재성이 있다-혼합주의이다. 어떤 것이든 다 좋다 다만 다른 나머지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가 회상한다. “나는 자기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한 한 사람에게 속해 있다. 이 힌두 재판관의 눈에 도대체 과연  ‘옳은 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15) 존스는 힌두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기까지의 그 자신이 걸어간 여정을 기록했다. “나는 나의 메시지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보수적으로 자랐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 모두를 방어하려고 나섰다. 언제나 방어적이었다. 나의 신학은 정돈되어 있었고 푸른 리본으로 단정히 묶여져있었다 – 불변”16) 그러다가 내가 깨닫기 시작했다. 시스템 대 시스템, 종교 대 종교 대립에서는 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과 그들의 말의 대립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므로” 그가 가르치신 모두는 그분 안에서 사실이다. 그는 단순히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분 스스로가 좋은 소식이셨다. 복음은 그 분 안에 있다. 철학은 진리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 이렇게 존스는 결론을 맺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의 믿음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듣는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그 중심을 차지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내가 예수님을 방어해 드릴 필요가 없기에 나는 자유스럽다. 내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신다.”17)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1960년과 1970년대에 브라질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을까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므로 존스의 발견은 저의 발견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시도와 실패 그리고 성경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계속되는 우리의 노력 가운데서라도 불신앙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을 공언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주마다 성경을 통해서 길을 찾으려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보통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해왔던 익숙한 포장을 벗겨내고 예수님만을 소개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다음 두 가지 질문에만 집중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는 어떤 사상과 신학에 대하여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논쟁에서 이길 필요도 없다. 하루하루를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에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진리를 다 소유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역시 진리를 찾아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생명으로 가는 진실되고, 살아계신,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한다고 해서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공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 길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주께서 그들을 아신 것 같이 그들도 알게 될 그 날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다른 이들도 합류하도록 초청하는 것뿐이다.”18)

전달자(Messenger)

이 장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전달자는 “내부자들(Insiders)”이다. 좋은 씨로서 세상에 뿌려진 믿는 이를 의미한다. 이웃들 가운데, 시장 터에 – 간단히 말하면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떻게 이들이 진리를 가지고 이 세상의 상대주의와 성공적으로 맞서고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전달자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다음의 6 가지 원리들을 온전히 기억하면 잘 되리라 생각한다.

2-1.예수 그리스도의 전달자가 된다는 것은 영적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사람은 어디에 있던지 세상의 체계에 묶여 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단의 통제 아래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19)

오직 영적인 무기만이 이 영적 전쟁에서 소용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20) 진정한 싸움은 보이지는 않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난다.

이때 쓰는 병기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기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을 닮은 삶이다.21) 우리가 이런 자원을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사용할 때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을 아들의 나라로 데려오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루신다. 회심은 하나님께서 총 지휘하시는 감옥 탈출작전이다!

2-2.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만 아니라 성육신이 포함된다.

복음에 관해서는 메시지가 매개가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바로 그 분이셨다. 그 분께서는 살과 피를 가지신 하나님이셨다. 그 분께서는 아버지의 몸을 가지셨다. 우리는 그 분의 메시지를 성육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23) 다른 말로 하면 사도 바울이 만났던 사람들은 메시지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의 삶에서 살아 있는 것을 보았다.

성육신의 의미는 육신을 부여한다 혹은 유형화하다 이다. 우리가 삶을 사는 방법을 묘사하는데 알맞은 단어이다. 믿지 않는 세상에 사는 믿는 이에 대해서 서신서의 저자들이 묘사할 때-다음 구절에서 바울이 그랬듯이 – 그들이 강조를 둔 곳이 믿지 않는 세상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24) 우리는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가 바로 진리가 부인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완전함이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실제로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진실할 때 거기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2-3. 그리스도께 가는 여정은 과정이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범하는 실수 중 가장 빈번한 것은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 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면 모든 메시지를 다 쏟아붓고는 결단 할 것을 요구한다. 적은 수의 몇몇 사람은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아주 종종 이러한 시도로 인하여 믿음보다는 대립하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믿지 않은 사람은 다시는 그러한 상황에 빠져들지 않기로 맹세를 하게 되고 전달자 지망생은 자기가 친구와의 거리를 멀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는 믿음을 나누지 않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될 일이다.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25) 금방 추수를 하였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그 밭에서 이미 수고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추수 때 일 수는 없으나 사실 심고, 가꾸고, 물 주고 그리고 거두는 일 중 하나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한 부분을 감당할 뿐임을 아는 것은 큰 위안을 준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시도록 기도해야한다. 우리는 가끔 거두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하다. 가끔 말로써 전도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2-4.전달자가 듣는 이들에게 맞추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까지 자민족중심적 사고를 가져야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관습과 전통 그리고 행동 양식을 고수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소속감을 제공해 주고 다른 이의 행동이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자신들만의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같은 이유를 가지고 거의 같은 양식을 만들어낸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를 수도 있는 행동 양식의 문제를 개인적인 확신으로 비화해 가지고는 이것을 일반화하여 모두에게 적용시키려는 경향까지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실체이다. 율법주의자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이런 독단적인 태도를 가지고 정해 버리고는 이 기준을 모든 이에게 적용하려 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나쁜 것이다- 고로 다른 사람도 이것을 행하면 안 된다.”

타고난 우리의 자기 민족 중심적 사고방식은 우리와 우리가 복음으로 다가가기를 원하는 사람사이에 장해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진 특이(特異) 문화까지 더 함으로써 그 장애물이 더 높아지게 될 경우 그 거리가 더 벌어져서 나중엔 뛰어넘지 못할 먼 거리가 되고 만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관습과 전통 가운데서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는 그들이 우리의 관습에 적응을 하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것에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랑이다. 믿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바울을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26)라고  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만들었다.

고린도에 살던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지침을 준 것은 바울이 그 곳 믿는 이들도 동일한 태도를 가지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27) 개인적으로는 거리낌이 되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하도록 배려해 줄 수 있는 능력이 복음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방해받지 않고, 순수한 복음의 본질을 그 사람에게 전해지게 만들어준다.

2-5.믿지 않는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은 팀이나 공동체적인 몸으로 함께하는 노력이다.

우리나라에서 해방, 자유, 개인의 권리 등은 기본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자유는 남용되기도 해서, 부정적인 의미를 주는 개인주의로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개척자적인 삶을 위해서는 개인주의 그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개척 단계에는 그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생존하기 위하여서 스스로를 의지하고, 스스로가 자원이 되어야 한다. 거친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는 이와 같은 태도가 중역회의실에서 통했다. 미국의 초창기 백만장자들은 그들 자신을 믿는 비범한 확신을 가지고 서부에 갔다. 먼저 그곳에 가서는 다른 사람 심지어는 정부의 개입도 용납하지 않았다. 성공은 소유와 권력으로 측정되어졌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우리 사역에도 그대로 도입하려고 계속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항상 큰 손해를 보게 한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절대 혼자서 갈 수 있도록 지어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어떤 은사는 주셨으나 다른 은사는 주지 않으셨다. 어느 누구도 모든 은사를 다 가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은사도 우리가 받은 은사와 동일하게 똑같이 중요하다.  우리의 부족함이 오히려 우리를 서로 상호의존적이 되게 만들며 사실 그 안에 우리의 진정한 힘이 숨겨져 있다. 연합하여 함께 일하는데 능력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8)

이런 우리의 연합과 상호의존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대면하게 격려해 주는 메시지가 된다.

이러한 방법은 아주 실제적인 면에도 적용된다. 우리 중에 누가 혼자서 계획을 짜고, 시작하고, 준비하고, 사역을 지탱할 수 있는 능력, 경험, 여유 있는 시간 모두를 가졌는가? 혼자서는 다 감당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친구들로부터 오는 작은 도움들로 인해 비로소 우리가 담당하는 작은 부분이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들의 능력을 가지고 서로를 보완해 주는 것을 배운 두 세 가족이 함께 하는 작은 팀이나 작은 규모의 그리스도인 모임에 큰 능력이 있다. 고기를 잡는 곳에 데려다 줄 수 있는 작은 배처럼, 자신들을 이 사회 주류의 사람들에게 데리고 갈 운송 수단을 이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이다.

2-6.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29) 목적으로 첫 세기에 작은 논문 하나가 쓰여졌다. 대략 18,800 단어로 이루어졌고 읽는 데는 두 어 시간이 걸리며 다 이해하는 데는 평생이 걸리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서이다.

초고속 서비스와 즉석 식품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이 복음을 축소시켜 그 내용을 몇 백자로 줄이고, 이십 분 동안에 설명 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재단하여 팜플렛에 싣는다. 어느 때에는 이러한 요약이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히 잘 채워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사람, 메시지의 부분 부분은 알지만 전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설명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도록 도와 줄 수 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는 소수이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나눌 때 이렇게 요약된 것을 나누는 것을 마치 복음 전체를 나누는 것으로 간주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이 그들이 사용하도록 배운 유일한 자료이다. 이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이렇게 요약된 메시지를 전해준다면 이교도의 신앙을 가지고 현대를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나는 믿지 않는 친구와 개인적으로 혹은 작은 그룹으로 모여서 이 첫 세기 논문을 단순히 읽고 이야기하는 것을 긴 기간 동안 해 보았다. 한 인격으로서의 예수님께서 대두가 되면 믿음이 정말 그럴 듯하게 보인다. 좋은 관계가운데 성경의 진리가 보태지면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몇 주간이 걸리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사역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강력한 것이다.

3. 믿는 이가 증거하고 치유하도록 힘을 불어넣음

우리의 사역은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는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심령이 상해 있는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기가 좀 어렵다는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30)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1)  우리 모두는 이 말씀에 다 해당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종이 되고 쇠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이것보다 더 깊은 데를 흐른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렇게 경고하신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32)  공평하지 못하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실제 인생살이이다. 당신은 절대로 계속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당신의 조상으로부터 그대로 당신의 삶에 그대로 물려져 왔는가? 심령의 상함은 대(代)를 내려 갈수록 더 커진다.

중독, 중독성 행동, 충동적 행동, 의존성, 상호 의존성 등과 같은 용어가 매일의 삶에 달고 다니는 어휘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았다. 세속적인 치료법이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영구히 자리잡은 듯하다. 이 세속적인 치료법의 기본 기능은 자신에 대하여 기분 좋게 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미리 미리 좋은 감정이라는 자산을 은행에 저축해 두었다가 다음에 필요할 때 가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한 치료사가 이같이 말했다. “결국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원하고, 더 나가서 그렇다고 말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생각이 듭니다…정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확인입니다.”33)

성경적인 상담가들은 세속적인 치료사들을 대신할 수 있는 귀중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성경적인 원리를 기초로 하여 일하는 상담가가 성경이 불러주는 진정한 목자 혹은 목사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이나 몸 밖에서나 어디서나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이 시대가 원하는 목자로서 잘 훈련된 사람들은 많은 섬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치유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들은 깨어진 관계로 점철된 과거 여러 세대가 가져다 준 오래 쌓여 온 영향력 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학대 받고, 무시되고, 팔려지고 등등의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 여러분은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는가? 좋은 치료사를 찾도록 도와주는가? 좋은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곳을 찾아 주겠는가? 교회에 보내는가? 전문의에게? 우리가 직접 도와 줄 것인가? 마지막 방법, 즉 우리가 직접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위의 모든 방법들 중에 제일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것만이 가능한 방법일 때가 있으며, 종종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4. 나가는 말

상대주의가 아무리 창궐해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위협할 수는 없다. 우리 복음 사역자들은 상대주의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만 인지하면 된다. 지금 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면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개념을 전방 개척 선교 현장 상황에서 상황화를 채용하여 실천에 옮길 때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다. 시도해 나가면서 배운다. 몇 번 성공해 보면 어떤 형태와 방법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 복음 사역자가 처해 있는 독특한 실제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타당하고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영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다음에 만나는 상황은 꽤나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위 국내에서의 성공적 모델을 그대로 개척 선교 사역에 도입하려기보다는 현지 선교지의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히 공감하고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바탕으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그들의 독특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맞춤형 사역이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전파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받는 이들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유연하게 그 형태를 변형하여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런 자유 속에 마침내 복음이신 메시아 예수님은 더욱 선명하게 전달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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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Petersen, Jim. 1992. Church without Walls. NavPress: Colorado.

2) 짐 피터슨Jim Petersen은 국제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국제 사역을 감독하는 전임 국제 팀 중에 한 사람이며, 세 명의 국제 부회장 중에 한 사람이다. 1963년에 브라질 네비게이토 사역을 개척했고, 그의 첫 번째 두 저서 Evangelism as a Lifestyle 과 Evangelism for Our Generation은 하나로 합쳐져서 Living Proof (1989)로 출판되었다.

3) 신바울 사역자는 1988년도에 서남아시아지역으로 파송되어 자비량하는 직업선교를 감당하였다.

4) The world’s religious make-up, % of total population 2101, Source: Pew Research Centre.

5) 오강남. 2003.  『세계종교 둘러보기』, 현암사: 서울 p24 에서 재인용

6) 길희성, 김영경, 김용표, 이강수, 이기동, 이정배, 홍성엽 편저,『경전으로 본 세계종교』(서울: 전통문화연구회.2001) 5 재인용

7)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다원주의 [宗敎多元主義] (원불교대사전, 원불교 100년기념성업회) 참조

8) 오강남. 2003.『세계종교 둘러보기』, 현암사: 서울 p24

9) 서철원.1976.『종교 다원주의』, 총신대학교출판부: 서울 p28.

10) Petersen, Jim. 1992. 『울타리 없는 교회』. 신현승 역. 피터 폴: 서울 P239.

11) 사도행전 4:12을 보라

12) Petersen, Jim. 1992. 『울타리 없는 교회』. 신현승 역. 피터 폴: 서울 P249.

13) Petersen, Jim. 1992. 『울타리 없는 교회』. 신현승 역. 피터 폴: 서울 P250.에서 재인용

14) 고전2:2-4를 보라

15) E. Stanley Jones, A Song of Ascents (Nashville, TN:Abingdon, 1968), p 86.

16) Jones, p.91.

17) Jones, p.107.

18) Newbigin, p.12

19) 고린도후서 4:3을 보라

20) 고린도후서 10:3,4을 보라

21) 에베소서:18을 보라

22) 요한복음 1:14을 보라

23) 데살로니가전서 1:5을 보라

24) 에베소서 5:8, 13, 15, 16을 보라

25) 요한복음 4:38을 보라

26) 고린도전서 9:22을 보라.

27) 고린도전서 10:27을 보라.

28) 요한복음 17:23을 보라.

29) 요한복음 20:31을 보라.

30) 마태복음 9:12,13을 보라.

31) 요한복음 8:34을 보라.

32) 출애굽기 3:47을 보라

33) Petersen, Jim. 1992. 『울타리 없는 교회』. 신현승 역. 피터 폴: 서울 P262.에서 재인용

*본고의 그림 및 도표는 전방개척선교 본문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전방개척선교 2015년 1-2월호(vol.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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